Marie-Thérèse Charlotte de France, 1778~1851
출생
1778년 프랑스 베르사유 베르사유궁(Château de Versailles)에서 아버지 루이16세(Louis XVI, 1754~1793, 재위1774~1792)와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d'Autriche, 1755~1793)사이에서 태어남.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8년(1770년 결혼)만에 태어난 아이였지만 왕실과 국민모두 아들을 기다렸는데 고대하던 아들이아니라 딸이라 모두 실망한 눈초리로 태어나자마자 미움을 사게되는데,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랑곳하지않고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낀다.
유아세례는 이후 목걸이사건으로 유명한 루이 드 로앙(Louis de Rohan, 1734~1803)추기경으로부터 받는다. 대부로는 스페인 왕 카를로스3세(Charles III, 1716~1788, 재위1759~1788). 장녀로 태어나면 받는 칭호 마담 후아이얄(Madame Royale)을 부여받는다.
프랑스 대혁명
11살이 되지않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 루이16세, 마리앙투아네트 게시글과 중복되므로 생략하겠다.
1791년 6월 20~22일밤에 루이16세가족이 프랑스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가려던게 이동도중 발각되는 바렌 사건(La fuite de Varennes, 1791)이 터지는데, 이때 샤를로트도 있었다.
샤를로트가 14살이 되던 해에 1792년 공식적으로 공화정이 선포되면서 아버지 루이16세는 폐위되고, 재판을 받게되는데 이후 유죄판결을받아 1793년 1월 단두대에서 처형당함. 이후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역시 10월에 처형.
이제 남은이는 샤를로트와 남동생(루이17세), 이모 엘리자베트(Élisabeth de France, 1764~1794)였는데, 이모역시 1794년 5월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남동생마저 옥에서 사망해버리면서 홀로 남게되며 세상과 완전 단절되며 가장 힘든 시기를 겪는다. 이때까지도 샤를로트는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아있는줄 알고 계속 교도관에게 면회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제 숨통이..?
1794년 자코뱅 급진혁명파 로베스피에르(1758~1794)가 1793년부터 사실상 프랑스의 권력을 손에 쥐게되면서 공포정치를 펼치다가 불만이 쌓인 반대파(지롱드파)에 의한 테르미도르 반동(La Convention thermidorienne, 1794)때 축출되면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자코뱅파도 몰락한다.
이 계기로 온건파인 지롱드파가 국정 주도권을 쥐게되면서 샤를로트도 이전보다는 생활이 개선되면서(지롱드파는 원래 루이16세 처형에도 반대했던 파임), 이때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되면서 매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실상 프랑스내 고위귀족이라고는 혼자만 남은 샤를로트였기에 연예인(?)대접을 받는데, 추종자들은 심지어 샤를로트가 머무는 숙소 근처에 집을 구하기도 한다. 이분을 볼려고..
이후 샤를로트또한 정치적도구로서 선전에 쓰이게 되지만 강요로 인한 무분별한 선전이 아니라 왕당파의대표로서 왕당파 대변인이자 대표역할을 자처하게 됨으로서, 추종자들이 더욱 받들게 됨.
삼촌의 베로나 선언
아버지 루이16세와 엇갈려서 해외로 도피에 성공하여 베로나(Verone)에 머무르고 있던 삼촌 루이18세(Louis XVIII, 1755~1824, 재위1814~1815, 1815~1824)가 1795년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는 선언인 베로나 선언(La Déclaration de Vérone, 1795)을 당시 샤를로트의 남동생 루이17세(Louis XVII 명목상 군주, 1785~1795)가 옥중에서 사망하면서 자신이 다음 왕위를 이을 첫순위이다 라고 선언을 한다.
그러나 이선언에 대항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 정부는 루이17세가 서거한 이후 부르봉 왕가의 계승이 단절되었음을 선언하고 루이18세를 거부한다(빠염).
오스트리아로
1795년 외삼촌인 신성로마황제 프란츠2세(François II, 1768~1835, 신성로마재위1792~1804, 오스트리아제국재위1804~1835)에게 가게되는데, 프랑스-오스트리아간 협약으로 샤를로트와 프랑스포로를 맞교환하게되면서 샤를로트는 오스트리아로 가게된다.
처음엔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를 방치해 죽게한 삼촌 프란츠2세를 비난했다[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2세(Leopold II, 1747~1792, 재위1790~1792)는 동생 앙투아네트를 구하기위해 노력했지만 서거하고나서 아들 프란츠2세가 황제가 되고난 이후에는 사실상 앙투아네트가 어찌되든 신경쓰지않아 처형당했다 라고 보는 것]. 그래도 일단은 자기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으로 여겨 편견은 사라졌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황실 내에는 다들 샤를로트를 꺼려하며 거리를 두었고, 삼촌 프란츠2세의 동의없이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프란츠는 샤를로트를 그의 남동생인 카를 루트비히(프랑스어 샤를-루이, Charles-Louis d'Autriche-Teschen, archiduc d'Autriche, 1771~1847)대공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샤를로트는 사촌인 루이 앙투안 다르투아(Louis-Antoine d'Artois, 1775~1844, 샤를10세의 아들)와 결혼하고싶었어서, 오스트리아에 와서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는다.
러시아, 결혼
당시 러시아에있던 루이18세가 러시아 황제 파벨1세(Paul Ier, 1754~1801, 재위1796~1801)에게 조카를 중개해달라고 부탁해서, 샤를로트는 오스트리아 빈 궁정을 떠나서 파벨이 또한 보호하고 있던 샤를10세와 낭군님 루이 앙투안 다르투아를 드디어 만나게 된다(현재 라트비아 지역). 1799년 공식적으로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삼촌 루이18세는 왕정의 정당성을 가지고있는 샤를로트를 사용하는데, 정당성을 내세워 왕당파를 결집시켜 다시 프랑스 왕으로 복위하겠다는 야망을 샤를로트를 통해 구현하려고 했다.
어찌저찌 같이 해외 여러 국가들을 돌아다니면서 지내던 샤를로트는 1807년에는 영국으로 가서 정착하게 되고, 이후 임신을 하게 되지만, 유산으로 인해 출산은 하지 못한다.
나폴레옹
1804년 프랑스 1제정을 꾸리는 나폴레옹1세(Napoléon I, 1769~1821, 재위1804~1814, 1815)가 통치할땐 돌아갈 생각도 못하고 해외에 머무르다가, 1814년 엘바섬으로 나폴레옹이 유배를 가게되면서 몰락한 보나파르트 왕조 대체로 부르봉 왕조가 복위되게 되면서, 루이18세를 비롯한 샤를로트등 이들은 파리에 입성하게 된다.
그러나 1815년 나폴레옹의 귀환 발표로인해 놀란 가족들은 일단 다 피신을 한다.
나폴레옹의 100일천하 이후, 온건정책을 폈던 루이18세였지만, 조카이자 동생 샤를10세(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의 둘째아들인 베리공작이 암살된후에, 온건정책을 버리고 강건정책을 쓰게되면서 다시 앙시엥 레짐(Ancien Regime, 혁명이전)으로 회귀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지만 1824년 서거해버리면서, 동생 샤를10세가 왕위에 오른다.
또 해외로..
1824년 루이18세의 서거이후 막내삼촌 샤를10세가 왕위에 오르게되는데, 온건정책을 고수해오던 루이18세와는 다르게 샤를10세는 앙시엥 레짐 이전으로의 회귀를 사실상 선언해버림으로서, 다시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다가 1830년 7월에 혁명이 일어나 샤를10세가 퇴위당하고, 시민왕 루이-필리프1세('Le citoyen', Louis-Philippe I, 1773~1850, 재위1830~1848)가 집권하면서 샤를10세가족과 샤를로트는 프랑스를 떠나게 됨. 프라하 궁정으로가서 다시 재기를 꿈꾸지만, 샤를로트는 남은 20여년간을 종교와 자선활동에 생을 바쳤음.
말년
이후 조카들의 교육에도 열성을 보이고, 조카들이 커서 결혼을 하게되었을때도 그 중재를 도맡아 하게되면서 사실상 대모역할을 자처한다.
그러다가 1851년 73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프로스도르프 성에서 폐렴으로 사망. 삼촌 샤를10세와 남편 루이 앙투안과 같이 해외에 묻혀있는 왕족으로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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