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Bourbon, 부르봉

루이 필리프1세

Mintaka5 2024. 6. 1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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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필리프1세(Louis-Philippe Ier, 1773~1850, 재위1830~1848)

  전임 군주 당시 재직 군주 후임 군주
프로필 샤를10세
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
루이-필리프1세
Louis-Philippe Ier
1773~1850
재위1830~1848
제2공화국 대통령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808~1873
대통령재임1848~1852
2제정 황제재위1852~1870

*나폴레옹3세(Napléon III)이다.

루이 필리프1세, 출처 - 위키피디아

출생

1773년 일드프랑스 파리 팔레후아얄(Palais-royal)에서 루이-필리프 도를레앙(Louis-Philippe II d'Orléans, 1747~1793)과 마리 아델레이드 드 부르봉(Marie-Adélaïde de Bourbon, 1753~1821)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프랑스 마지막 군주

이 군주이후로 프랑스에서는 2024년에 이르기까지 군주는 없고 공화정으로서 대통령이 주기적으로 선출이 된다. 루이16세와는 같은항렬의 친척이고, 루이13세의 아들 필리프 도를레앙(Philippe d'Orléans I, 1640~1701)이 루이 필리프1세의 5대조가 된다. 

 

프랑스 대혁명

16세일때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자, 귀족가문중에서도 고위귀족집안인 오를레앙가의 장남으로서 노선이 중요했는데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당시 오를레앙 공작이던 아버지 루이-필리프 도를레앙(Louis-Philippe II d'Orléans, 1747~1793)의 노선에 따를 수 밖에 없었는데, 처세술의 달인이였던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대혁명에서 혁명파에 가담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귀족임을 부정하고 아버지는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 루이-필리프는 '평등한 자의 아들'(Égalité fils)로 불리게 된다. 아버지 루이-필리프 도를레앙은 혁명군을 물신양면으로 지원하고, 그들의 든든한 방패막이 되지만 역시 사람속은 알길이 없듯이 지원해주면서도 복위를 계획하는 이중적인 면을 보이는데, 이게 발각이 되어버려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1793년).

 

도망자

이렇게 아버지의 음모가 발각된이후 처형을 당하고, 루이-필리프에게도 위협이되었는지 바로 해외로 나갈준비를 한다. 첫번째 목적지는 스위스인데, 어릴때부터 고급교육을 받아 강사로 벌이를 시작하는데 생활에 겨우보탬이 될 정도였다고 했고 그리고 매년 국가를 옮길정도로 매우 힘겨운 망명생활을 하는데, 여기에 이유가 하나 있다. 앞서 언급한 아버지 루이-필리프 도를레앙(Louis-Philippe II d'Orléans, 1747~1793)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며 왕위에 오를 기회를 엿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을 것인데, 그러나 충격적인건 루이16세의 처형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게 귀족들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알려져버려서 부르봉 직계가문의 귀족들에게 거의 무시를 당하는 것이다.

 

나폴레옹1세

프랑스 대혁명이 벌어지고 1793년 반 쿠데타 음모를 꾸미던 아버지 루이-필리프 도를레앙이 처형당하게 되면서 스위스로 망명하여 교사를 하면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간다. 1793년부터 지속된 망명이 오래 지속되다가 망명 도중인 1800년쯤 나폴레옹(Napléon Ier, 1769~1821, 재위1804~1814, 1815)이 프랑스에서 실권을잡고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자, 더욱이 루이-필리프가 돌아가기가 어려워지게 되어버리면서 더 조용하게 타국에서 지내게 된다. 이후 1814년 나폴레옹1세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하게되면서 파리가 연합군에 의해 점령을 당한다. 그렇게 나폴레옹1세가 엘바섬으로 유배를 가게되면서, 친척인 루이18세(Louis XVIII, 1755~1824,재위 1814~1815,1815~1824)가 즉위하게 되며 부르봉 왕정복고가 단행된다. 그렇게 루이-필리프도 21년만에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자유파(혁명파)를 후원하고 앙시엥 레짐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것을 반대하면서, 게다가 검소한모습을 보이게 되면서 시민들사이에서 인기가 꾸준히 올라가게 된다.

 

샤를10세 퇴위

1830년 샤를10세(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의 퇴진을 요하는 7월혁명이 일어나게되면서 샤를10세가 폐위되고, 의회에서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하게 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루이 필리프1세는 역대 군주들과 다른 한가지점이라면, 칭호를 다르게 했다는 것인데, 기존의 왕권신수설(프랑스의 왕은 왕권이 신에게 부여받아 왕국은 왕의 소유)에서 루이-필리프는 왕은 왕권은 국민들로부터 부여받았다는 뜻으로 바뀐다. 시민들로부터 옹립된 왕이라 하여, '시민왕'(Le roi-citoyen)이라는 별명이 있다. 즉위 이후 그럭저럭 그런데로 대내외적으로 프랑스를 잘 운영해 나간다.

 

본인의 퇴위

즉위 16년이였던 1846년부터 대흉작이 발생했음에도 적당한 대처를 안한 점과 1847년 개헌안 부결, 경제불황등으로 곪았던게 1848년 2월에 시가전이 펼쳐지면서 혁명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틀만에 루이필리프는 손자 파리백작 필리프(Philippe de Paris, 1838~1894)에게 왕위를 넘겨, 명목상으로 계승을 하는데 인정을 받지못하고, 나폴레옹3세가 되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1873, 재위1852~1870)를 대통령으로 하는 제3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루이-필리프는 영국으로 망명을 또 가게되고, 2년뒤 1850년 사망하게 되면서 이로서 프랑스의 군주제는 막을 내리게 되고 오늘날까지 대통령제로 국가가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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