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Bourbon, 부르봉

루이18세

Mintaka5 2024. 6. 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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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XVIII(1755~1824, 재위1814~1815, 1815~1824)

출생

1755년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에서 루이 페르디낭 드 프랑스*(Louis Ferdinand de France, 1729~1765)과 마리 요제파 폰 작센(Marie-Josèphe de Saxe, 1731~1767)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남. 루이16세(Louis XVI, 1754~1793, 재위1774~1792)의 친동생.

 

역시.. 권력이란 형제도 어쩔 수 없구나

원래는 루이18세가 루이16세다음가는 왕위계승자로서, 형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루이16세가 1781년 루이 조제프(Louis-Joseph de France, 1781~1789)를 낳고나서 갑자기 사이가 좋지않아지게 됨(역시 권력이란..)

질투에 가득한 루이18세와 미래의 샤를 10세(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와 아주 뒤에서 은근히 안티를 벌임.. 

태어날때부터, 자라는 곳도 베르사유 궁인 루이18세로서, 모든 형들이 다 살아있던 1760년 기준으로 왕위계승서열3위로서 교육을 탄탄하게 받아오는데, 당시 군주였던 할아버지 루이15세의 사랑을 별로 받지는 못하는 점이 형들에 대한 열등감을 키운 것이 아닐까,

 

거 답답한데.. 머리좀 굴리볼까?

우유부단한 루이16세의 뒤에서 형을 이간질까진 아니지만 힘을 빼기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을 쓰게 되는데, 재정총관 튀르고, 네케르등의 몰락을 토대로 형 루이16세의 궁정을 선동시키고, 당시에 열렸던 삼부회의 제3계급 평민들의 총회 의원 대표수를 2배로 늘릴것을 요구하는 등의 일을 펼치는데..? 크게 먹히지는 않는 듯 하였다. 이 일은 미래에 루이18세가 왕위에 오르고난 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라고 인식함.

 

아이고 행님..

1789년 중반에 그 유명한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되면서 혼란스러운 시국에 1791년 형 루이16세 가족과 같이 도망치는데 바렌사건(La Fuite de Varennes, le 20~22 juin 1791)에서 두 형제의 운명이 갈리게 된다.

1791년 6월20일 새벽1시경에 루이16세, 18세 가족등이 궁을 버리고 도주를 감행하게 되는데, 6시경에 시녀들이 문안을 갔다가 텅 비어있는 궁을 보고 국민의회에 전달하고(9시쯤) 나서 의회에서 난리가 난다

그래서 바로 추격조가 급파되는데,, 6월21일 아침일찍 출발한 루이18세가족은 탈출에 성공하나, 루이16세는 체포되어 파리로 다시 끌려오게 됨.


이건 뭐고?

이후 1793년 1월에 형 루이16세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처형전 루이16세가 아들 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 1785~1795, 명목상재위1792~1795)를 명목상 군주 루이17세로 올렸는데, 조카의 섭정을 선언해버리고, 1795년 루이17세가 죽고, 루이18세로서 정식 승계를 받았다고 주장을 하게 됨.

이후 장기간동안 타국에서 오랜 생활을 거치는데, 당시 떠오르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 재위1804~1814, 1815~1815)가 파리를 장악하고, 부르봉왕가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게 됨. 루이18세는 나폴레옹과 협상을 시도하며, 건드려보는데 나폴레옹에게 조롱을 듣고 결국 수확은 없었다.

 

아 얜 뭐고진짜..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위에 스스로 오르게되면서 프랑스 제1제정이 출범하게 되면서, 더욱이 루이18세의 부르봉왕가는 갈길을 잃게 되는데, 타국에서도 또 이동을 하게 되어버린다. 장기간 해외 체류때문일까 지쳤기도 한 루이18세는 1804년이전의 모든 사면을 인정하고, 프랑스 국민들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자유와 평등, 재산 유지, 보호를 보장한다고 하는 선언문을 쓰게 됨(함부르크에서 인쇄되고, 유럽대륙 전체에 배포됨)

이렇게 활동하면서도, 바로아래 동생 미래의 샤를10세인 아르투아백작(Comte d'artois, futut 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의 측근들이 루이18세를 경계하고 계속 건드리고, 심지어는 해외에서도 추방을 하기위해 머리를 굴린다.

그래서 루이18세는 어쩔수 없이 정치적행동을 취하지 않겠다, 왕의칭호를 거부하겠다 등 처세를 발휘해서 어쩄든 간에 살아남게 됨(여튼 가까운게 더 위험하네..).

 

져라~ 나폴레옹

나폴레옹이 정점을 찍고, 1810년대가 들어오면서부터 슬 꺾이기 시작하자 루이18세는 점점 복위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 시작하는데,  근데 대내외적으로 인지도가 없던 루이18세라 망설이고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게 됨. 1814년 파리로 입성해 헌장을 수락하고 왕위에 올라 통치를 하다,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금 100일간 권력을 잡다가(100일천하) 워털러전투(Défaite de Waterloo, 1815)이후 완전히 몰락하자, 다시 군주가 됨. 

여러번 얻어맞은 루이18세였기에, 2번째 복위이후 국민들을 위해 전쟁배상금완화, 세금문제등 여러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니들편이데이?

이후 1824년 사망할 때까지 혁명과 나폴레옹, 앙시엥 레짐의 유산을 조화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고심하게되는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게 되는데, 나름 온화적인 편이였던 루이18세였기에, 국민들과 귀족들등 조율을 나름 잘 했다고 한다. 물론 이전의 화려한 생활(로코코식 문화)은 시대상에 맞지 않다고 판단, 왕실예산을 대폭축소하는데 너무화려하지도 않고 너무 단조롭지도 않게 유지를 했다.  

그래도 온화한 성품때문일까, 보수파와 자유주의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데 나름 중재역할을 잘 했다는 평을 지금도 받는다. 재위기간동안 노예제도와 노예무역도 폐지를 시키기에 이름.

 

불길한데..

1820년 조카(샤를10세의 아들)이자 왕위계승서열 3위인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Charles-Ferdinand d'Artoisduc de Berry , 1778~1820)이 파리한복판에서 자유주의자에게 암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루이18세도 급진적으로 태도가 바뀌게 되는데, 이로 인해 온건정책을 중단하고 앙시엥 레짐 이전의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됨. 

이후 1824년 자식없이 사망을 하게 됨.

루이18세는 최종적으로 역대 프랑스 군주들이 매장된 생 드니 대성당 지하카타콤에 안장되는 마지막 군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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