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X(1757~1836, 재위1824~1830)
출생
1757년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에서 루이 페르디낭 드 프랑스(Louis-Ferdinand de France, 1729~1765)와 마지조제프 드 삭스(Marie-Josèphe de Saxe, 1731~1767)사이에서 5남으로 태어남(형들 수두룩). 원래같으면 군주가될 운명이 아니였으나, 프랑스혁명등 운명의 소용돌이로인한 혼란으로 군주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
군주가 되기전 작위는 아르투아 백작(Comte d'Artois).
머리 잘 굴리네..
형들처럼 덩치가 비대하지않고 관리가 된 체형에 외모까지 되는데, 성격까지 인싸기질을 타고나서 당대의 인싸 마리 앙투아네트와 많이 놀았다고 한다. 이후 결혼을 하고나서도 뭐 비슷하다.. 수많은 애인.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샤를10세(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의 특징은 앙시엥레짐 이전방식의 통치사상인 것. 다들 알다시피 1789년 프랑스 대혁명(La Révolution française, 1789~1799)이후 공화정, 제정등이 들어서면서 이전과는 완전 다른 정치양상을 띠게 되는데, 샤를10세는 즉위전 군주인 형 루이18세(Louis XVIII, 1755~1824, 재위1814~1815, 1815~1824)의 온건적인 정치방식과는 완전 다른 절대주의식 정치를 군주가되어서 실행하게 된다.
빠르네..
이런 사고를 가진 샤를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바로 영국으로 망명을하는데, 거기가서도 자기는 뒤로 쏙 빠지고 다른 강대국 군주들에게 프랑스 혁명군을 쳐달라고 하는식으로 혁명 반대를 외치고 다닌다. 뭐 다른군주들이 샤를10세의 말을 듣고 침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당시엔 유럽국가 거의 대부분이 군주가 통치하는 군주국들이였고, 그 군주국을 뒤엎은 혁명군으로인해 자기들도 혹여나 저리 되지않을까 하는 명분으로 연합해서 프랑스르 친다.
심지어는 나폴레옹이 실권을 잡은 상태에서도 암살하기위해 자객을 보내는 등 노력을하지만, 실패하고 프랑스로 오는시기가 계속해서 길어지게 됨.
나폴레옹..언제? 난 언제 왕되노..?
180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였던 것 같다. 나폴레옹이 실권을잡고 황제위에 오른1804년부터 1814년 엘바섬 유배까지 샤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전의 암살미수사건으로 모든 세력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뭐그냥 해외를 떠돌아다니는 시기라고 보면됨.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를 가고 형 루이18세(Louis XVIII, 1755~1824, 재위1814~1815, 1815~1824)가 왕위에 오르고, 샤를도 돌아오게 되는데, 100일천하로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황제가 된 나폴레옹.. 이후 워털루전투에서 처참한 패배이후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를 간뒤는 그곳에서 죽게되는데, 워털루전투이후 루이18세가 다시 복위를 하게되면서 중간에 튀었던 샤를도 다시 돌아오게되면서 왕태제 역할을 하게 됨.
왕됬다이
1824년 형 루이18세가 자식없이 죽게되자 드디어 샤를이 샤를10세로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절대주의 왕정으로의 회귀가 노선인 샤를이기에, 형 루이18세가 취했던 온건정책은 온데간데 없이되고 수상, 장관등도 모두 귀족출신으로 앉히는등의 인사를 개편하기에 이름.
프랑스 왕실이 1600년대부터 유럽의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자부심 때문일까, 당시 국내 정세는 고려하지않고 더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정책들을 펴게되는데 사실상 종교문제로 싸움이 잦던 1500년대까지 회귀했다고 보면 될 거 같다.
알제리가 식민지가 된 시기도 샤를10세시기이며, 국내외적으로 5대조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가 썼던 방식을 많이 따라한 거 같다.
하..인생 덧없네
즉위부터 이전방식을 추구했던 샤를10세이지만, 총선때 위협이 안될정도로 의석이 작았던 자유파와 입헌군주파를 크게 건들이진 않았는데, 즉위 5~6년차가되면서 대내외적으로 압박을 넣었던 사항들이 곪아터지기 시작하면서 총선결과도 점점 만족한결과가 나오지않아 해산하고 다시치르는 형태로 선거를 치르는데, 1830년 총선에서 왕당파가 자유파와 입헌군주파에게 크게 패하면서(274vs왕당104) 빡친 샤를10세가 왕당파에 지지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반대의원들을 처벌한다는 연설이후 뚜껑이 열린 상대의원들과 시민들이 반발해서 입헌군주제요구조건의 청원서를 발표하는데, 이역시 샤를은 쌩.. 이후는 바로 혁명.(1830년 7월혁명)
이 혁명도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면서 강경진압에 나서지만, 이후에 샤를10세의 군대도 시민들의 편에 서게되면서, 샤를10세는 실각하고, 이후 폐위됨(1830년). 이전에 손자 앙리 다르투아(Henri d'Artois, 1820~1883 명목상군주)를 앙리5세로 즉위시키려고 했는데 역시 무산, 오를레앙 공작이자 친척인 루이-필리프 도를레앙(Louis-Philippe d'Orléans, 1773~1850, 재위1830~1848)에게 왕위가 감.
또 나가네..
폐위이후 프랑스에서 추방당해 또 해외로 가는 신세가 되는데, 영국에서도 쫓겨나고, 먼~친척 프란츠1세(Franz I, 1768~1835, 재위1792~1806, 1804~1835)에게 초청을 받아 겨우 정착을 하게되는데, 이미 고령(75세이상)인 샤를은 쇠약해진 상태로 이동을 번복하다가, 1836년에 프랑스가 아닌 이국땅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하게 됨.
현재 샤를10세의 묘는 프랑스에 있지않고, 슬로베니아 카스타그네비차 수도원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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