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Capétiens, 카페왕조

필리프2세

Mintaka5 2024. 6. 1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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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e II "Auguste"(1165~1223, 재위 1180~1223)

 

 

출생

1165년 일드프랑스 고네쓰(Île-de-France gonesse)에서 아버지 루이7세(Louis VII, 1120~1280) 와 어머니 아델라드 샹파뉴(Adèle de Champagne, 1140~1206)사이에서 1남1녀중 첫째로 태어남.

 

L'introduction

아마 외교계와 권모술수계에선 당대에 상대할만한 군주가 없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군주.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이간계를 사용하고 또 그로인한 기회를 노려 당시에 영국 플랜테저넷 왕조와 앙주, 푸아티에 지역까지 프랑스 영토의 60%에 해당하는 영토를 야금야금 다시 되찾은(가스코뉴와 아키텐일부영토 제외) 군주이다. 

 

불리한 초기상황?

앙주제국에 의해 프랑스영토 대부분이 제국영토로 되어버려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물려받는데, 사실상 현재 일드프랑스주에 해당하는 영지가 당시 프랑스왕국 영지라고 봐도 무방할만큼 영향력이 적었다.

 

역시 비범해..

1179년 몸이약해진 루이7세(Louis VII, 1120~1280)는 필리프와 함께 공동통치를 제안하고 사실상 필리프가 모든역할을 도맡아 통치를 하게되는데, 그다음해 1180년에 당시 앙주제국의 통치자인 잉글랜드 플랜테저넷 왕조 헨리2세(Henry II, 1135~1189, 재위1154~1189)사이에 체결된 방어 및 지원에 관한 협정인 3차 기조르 조약(Traités de Gisors, 1180)을 체결하면서 잠시동안 평화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때 필리프2세의 나이15세..

그리고 1180년 당해 아버지 루이7세가 서거하게 되면서, 친정을 시작하게 된다.

1182년, 유대인을 추방하고 재산까지 몰수시키는데, 아버지 루이7세가 했던 정책과 반대되는 사항인데(유대인 공동체)프랑스 왕국내 유대인들을 붙잡아 재산을 빼앗는데, 이 계기로 유대교를 버리고 재산을 찾게되고, 카톨릭으로 개종하면 살 수있다는 방법하에 개종을하고 프랑스인들과 융화가 되는 효과가 나온다. 

필리프는 실질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처벌 탄압보다는 그들의 재산에 세금을 더 부여하고 몰수해 국고를 채울 목적으로 보여진다. 물론 오랫동안 유지하면 탈이생김을 알기에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이쟈 작업좀 시작해볼까?

현 프랑스영토의 70%이상을 차지한 광활한 앙주제국은 필리프2세에게 늘 신경이 쓰이던 영토였는데, 어떻게하면 다시 옛영토를 수복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했던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첫작업이

헨리2세(Henry II, 1133~1189, 재위1154~1189)의 아들들과 친하게 지내보는 것이였다. 일단 여러 아들들중 청년왕헨리(Henry le Jeune, 1155~1183), 리처드1세(Richard Ier 'Cœur de Lion', 1157~1199, 재위1189~1199)가되는 리처드, 조프루아 드 브르타뉴(Geoffroy II de Bretagne, 1158~1186)등과 친하게 지내는데, 형제들간의 권력을 교묘하게 이용해 한명이 거슬리면 반대쪽 두명과 접촉, 또다른 한명이거슬리면 또 반대쪽과 접촉하며 은밀하게 군사를 보내 지원하는등 교묘하게 형제들의 권력욕을 이용해서 이간계를 벌여 형제들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

 

3차 십자군

2차십자군(La deuxième croisade, 1147~1148)이 끝나고 한참 조용히 있던 유럽대륙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지는데, 예루살렘에 주둔하던 십자군이 아이유브 왕조 살라딘(Saladin, 1138~1193, 재위1174~1193)에 의해 병력의90%가 사망하는 대패를 당하고 이슬람세력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사건으로 교황 우르바노3세(Urbanus III , 1120~1187, 재위1185~1187)이 충격을 받아 드러누워 결국 선종해버리고 마는데, 이후 로마입성을 거부당해 교황청에 들어오지못하고 2달만에 선종한 그레고리오8세(Gregorius VIII, 1110~1187, 재위1187)의 다음 교황으로 클레멘스3세(Clemens III, 1130~1191, 재위1187~1191)때에 와서 십자군원정을 추진하게 됨.

즉시 잉글랜드 헨리2세와 프랑스 필리프2세의 대립을 중지시키고,  당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Frédéric Barberousse, 1122~1190, 재위1152~1190)를 필두로 3차십자군(La troisième croisade, 1189~1192)이 펼쳐지나, 헨리2세와 필리프2세는 다시 싸우고, 바르바로사도 1190년 도강도중 익사해버려.. 사실상 십자군은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잉글랜드에서는, 리처드1세가 아버지 헨리2세를 상대로 동생 존(Jean sans Terre, 1166~1216, 재위 1199~1216)과함께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다(리처드를 부추긴게 필리프2세).

 

조금만 더..

리처드가 또 위기에 쳐했을 시, 필리프2세는 리처드의 동생 존을 충동질시켜 왕이 되고싶지 않냐 이렇게 꼬시면서 지원을 하게되는데, 리처드가 잉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물거품이 되는데, 잉글랜드에 없는동안 필리프2세가 야금야금먹은 프랑스본토영토를  뺏겨서 빡친 리처드가 전쟁을 일으키는데, 필리프는 한술더떠, 국경지역 귀족가문을 선동시켜 리처드에게 대항하게 만들면서 자기는 뒤에서 결과를 지켜보는 상황을 만들었다(역시..)

1199년 리처드가 전투도중 전사하게되면서 자식이없는 관계로 자연스레 동생 존에게 왕위가 이동했는데, 그렇다고 필리프가 또 가만히 있겠는가?. 싶을것이다. 역시 그게정답

계속해서 프랑스본토 영국령영토를 조금씩 야금야금 먹어치우면서 존의 군대도 박살낸다. 1205년까지 각각 남한만한 사이즈가 되는 아키텐과 노르망디를 빼앗아온다.

존 역시 위기감을 느끼고 1214년(마그나카르타 법전으로 머리 맞기 1년전)에 여러국가 연합군을 조직해 필리프2세를 치게됨. 오히려 4:1이라는 불리한 싸움에서도 필리프는 부빈 전투(La bataille de Bouvines, 1214)에서 승전을 거두고 확실하게 프랑스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만들게 됨. 이후 존은.. 법전샷 당첨.

 

서거

1223년 일드프랑스 망떼 라 졸리(Mantes-la-Jolie)에서 58세로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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