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is X le Hutin, 1289~1316, 나바라재위1305~1316, 프랑스재위1314~1316
출생
1289년 프랑스 왕국 파리(Paris)에서 아버지 미남왕 필리프4세(Philippe IV le Bel, 1268~1314, 재위1285~1314)와 어머니 잔1세 드 나바라(나바라어: 호아나1세, Jeanne Ier de Navarre, 1273~1305, 나바라재위1274~1305)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루이10세의 별명 'Hutin'은 프랑스어로 고집이세고 싸우기를 좋아하는이라는 뜻이 나오는데, 성격이 그런것이 아니라, 즉위시기가 혼돈의 시기라는 뜻에서 'Hutin'이 붙여진 것.
초년
어머니 또한 나바라의 여왕이였는데, 아버지 필리프4세보다 먼저 서거하게 되면서, 루이가 루이1세 드 나바라로서 나바라 왕 작위와 샹파뉴 백작 작위를 물려받는다. 루이의 아버지 필리프4세(Philippe IV le Bel, 1268~1314, 재위1285~1314)는 아내가 사망하면서 공석이된 나바라왕국의 왕좌를 루이에게 앉게하면서 루이의 첫번째 아내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Marguerite de Bourgogne, 1290~1315)역시 남편을 따라 나바라로가서 나바라 왕비로 즉위.
이사벨 드 프랑스
루이10세에겐 이사벨 드 프랑스(Isabelle de France, 1295~1358)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성인이 되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2세(Édouard II, 1284~1327, 재위1307~1327)에게 1308년에 시집가게 되는데 에드워드2세는 양성애자였고, 그의 파트너들이 정계에 앉혀지면서 안그래도 정치적으로 무능한 군주인데, 더 능력없는 파트너들까지 얹혀놔서 국정이 파탄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마침 오빠 샤를4세(Charles IV, 1294~1328, 재위1322~1328)를 알현할일로 프랑스에 갔을 때 이미 이전에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한 로저 모티머 백작(Comte Roger Mortimer, 1287~1330)을 만나 남편을 쫓아내기 위해 힘을 합친다.
사실상 에드워드2세의 측근들을 제외한 모든 세력들이 반란에 가담하면서 에드워드2세를 체포, 이후 폐위시키고 아들인 15세의 에드워드3세(Édouard III, 1312~1377, 재위1327~1377)를 왕위에 앉히고 이사벨이 섭정을 하게 됨.
이 에드워드3세가 재위하고 10년뒤에 일어날 백년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사람이 될지 그누구도 몰랐다.
네슬레 탑 사건
1314년 사실상 카페왕조의 대가 끊기는 도화선이 되는 네슬레 탑 사건(La tour de Nesle, 1314)이 터지는데, 이전 샤를4세 게시물에도 올렸듯이 필리프4세의 세 아들 루이10세, 필리프5세, 샤를4세의 아내가 모두 네슬레 탑에서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간통죄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감금이 되면서, 루이10세의 아내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Marguerite de Bourgogne, 1290~1315)는 가이야르 성(Château-Gaillard)에 감금되고 이듬해 사망한다.
그래서 루이10세는 두번째 부인으로 클레망스 드 헝가리(Clémence de Hongrie, 1293~1328)를 맞이하고 아버지 필리프4세가 1314년 말 서거하면서, 그녀와함께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다.
재위
1년반여년의 짧은 재위기간이였지만, 왕실 수입을 늘리기 위해 농민들에게 세금혜택, 유대인의 프랑스 입국허가를 포함한 개혁을 시도한다. 물론 귀족들의 반발을 사면서 사실상 궁지에 몰리는데, 이때 힘이 되어준 동생이 샤를 드 발루아(Charles de Valois, 1270~1325, 미래의 필리프6세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루이는 화폐개혁을 통해 재정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는데, 귀족들이 자체 통화발행을 외치며 협박을 하니 더이상 세금을 인상할 수 없었고, 지방역시 과도한 세금으로 인해 루이10세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결국 협상카드를 꺼내들며 지방자치를 승인해주고 만다(왕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협상에 루이10세도 맞장구를 쳐주는데, 1315년 8월 프랑스 왕국내의 농노제를 폐지하면서 사실상 농노 해방을 선언한다. 물론 다 자유가 아닌, 자유를 돈으로 구매하라는 것(.....)이였고 진짜 농민들을 위한 선언이 아니라, 군사를 일으킬 비용충당을 위한 고육지책이였다고 본다..
서거
1316년 6월, 폐렴으로 27살의 나이로 갑자기 서거해버린다.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약물중독이란 설도 있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임신한 아내 클레망스를 두고 사망해버린 루이10세였기에, 당시 클레망스는 임신 4개월정도 된 것으로 보인다. 11월중순에 아들 장1세(Jean Ier, 1316~1316, 5일간 생존하면서 재위)가 태어나지만 5일만에 사망하면서 이미 태어나기전에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뜻에서 '유복자 왕' (Posthume)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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