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Capétiens, 카페왕조

루이9세

Mintaka5 2024. 5. 9.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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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IX, saint catholique (1214~1270)

르 그레코(Le Greco, 1541~1614) 1585-1590작,

일드프랑스 푸아씨(Île-de-France poissy)출생

카페왕조 직계(Capétiens directs, 987~1328)군주로서, 성자 루이(Saint Louis)로 알려져있다.

"사자왕"루이8세(1187~1226)의 차남인데, 장남 필리프 드 프랑스가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장남으로서 대우받는다[루이9세 시기에는 왕태자(도팽, dauphin)이 공식적인 지위가 아닐 시기임. 샤를5세(1338~1380)때 처음으로 쓰여짐]

1226년 아버지 루이 8세가 남부프랑스 랑그도크 지역복속과 이단을 처리하는 명분을 가지고 교황과함께 알비십자군에 몸소출전하다가 갑자기 사망하는바람에 당시 12세의나이로 루이9세가 즉위하지만 20살성년이될때 친정을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에따라 어머니 블랑슈 드 카스티유(1188~1252)가 섭정(la régente)이되어 1235년에 20세가되는 루이9세의 섭정이 되기로하였으나, 실질적으로 1241년이 되어서야 루이9세의 친정이 시작됨.

당시에 보기힘든 개혁군주인데, (아마 영조+정조의 포지션이라 할 수 있을까)  무죄 추정의 원칙을, 고문근절, 신명 재판( 재판의 결과는 신만이 알 수 있다), 사적 복수를 금지를 추진,도입함. 

심지어 재판결을 위해 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일종의 백성이 왕을 불러서 민원을 제기하는 격쟁제도를 도입(조선에서는 정조가 가장 많은 격쟁횟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정조는 1700년대 중후반 군주)

신앙심이 깊은것에도 모자라, 백성들의 발을 씻겨주고, 직접 식량을 나눠주는등 신앙심을 토대로 행동까지 했던 군주인지라, 당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1270년 십자군전쟁 도중 열사병으로 튀니스에서 붕어하게 된 후에 손자 필리프4세(Philippe IV le bel, 1268~1314)의 재위때인 1297년에 당시 로마교황 보니파시오8세(Bonifacio VIII, 1235~1303)에게 겨우 시성을 받게 됨. 

프랑스의 군주중 유일하게 시성을 받은 인물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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