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노량 해전

Mintaka5 2025. 4. 7.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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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해전, 1598. 12. 16(양력)

 

 

 

배경

1598년(선조31년) 12월16일, 삼도수군통제사겸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 2만여명이 경상도 노량 앞바다(현재 경남 남해군 설천면)에서 왜군을 대파한 해전이다. 왜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1598, 관백재위1585~1592, 태합재위1587~1598)가 노량해전이 터지기 3개월전인 1598년 9월 61세로 병사하면서 사기문제로 조선에 출병되어있던 왜군들에게는 태합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비밀로 하였지만 곧 조선에 있던 왜병들에게 전달되고 철군명이 떨어짐에 따라 본국으로 철수준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이들을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고 이에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1543~1607)과 이들을 섬멸하기위해 경상도 노량 앞바다로 출정하게 된다. 

 

발단

I. 명량해전

노량해전이 발발하기 한해 전인 1597년 10월, 명량 해전이 발발한다. 당시 조선 수군 총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1545~1598)은 벽파진쪽에서 전투를 벌이기엔 울돌목쪽 해협이 더 좁고 13척의 적은 함선으로 공격을 펼치기에 용이하다 생각하여 전선을 옮긴다. 울돌목의 급류를 이용해 왜 수군 함대의 기동성을 제한시키고 화력을 퍼부어서 결과적으로 왜군이 대패(왜 전선59척 격침, 330여척중 절반이상이 궤멸)하는 쾌거를 이루고 조선 남해안에 대한 제해권을 조선이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II.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왜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관백재위1585~1592, 태합재위1587~1598)는 명량해전 대패 이후 육군마저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게다가 충청도 직산 근처까지 진격한 군대가 보급로가 막혀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본거지가 있는 부산쪽으로 왜군들을 후퇴시키는데, 그러다 이듬해 1598년 9월 왜 수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도요토미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조선에 출정해있는 군대가 동요를 일으킬 것을 우려해 자신의 죽음을 우선적으로 알리지 않지만 결국 이후 도요토미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조선에 주둔해있던 왜군들은 당황하고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들은 더이상 진격하기에는 보급로가 끊길 위험과 패전을 거듭하여 사기저하, 거기다가 혹독한 겨울이 눈앞에있다는 사실에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물려 철군을 시작하게 된다. 

 

III. 순천 왜교성 전투

왜군들은 본국으로의 철수를 위해 울산, 사천, 순천등으로 집결하고 있던 상황이였는데 순천 왜성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의 군대를 축출하기위해 조-명 연합군 5만여명은 공격을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성을 공격하면서 어느 한쪽도 뚫리지 못한 성 공략에 피해만 커지게 되면서 명군은 군대를 뒤로 빼서 아예 지켜보자는 주의가 되어버린다. 거기다가 명나라 수군도독 유정(1558~1619)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뇌물을 받고 전투에 참전은커녕 회피하면서 사실상 협조하지 않는다. 그렇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도독 진린(1543~1607)의 연합군대가 힘을 합하여 결과적으로는 조-명연합군의 피해가 너무 커져서 전략적으로 왜군에게 패배하게 된다. 

 

IV. 노량해전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1568~1615)는 장인의 군대를 구출하고 퇴로 확보를 위해 1598년 12월 15일 함선 500여척에 6만에달하는 수군을이끌고 경상도 노량(남해군)앞바다로 향한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1545~1598)은 이들의 이동경로를 미리 예측해 매복시킨 뒤 다음날 새벽인 16일 노량앞바다에 왜 수군 함선들이 진입하면서 맹공격을 펼친다. 아침해가 동트고 8시경이 되었을 때 쯤 왜군 500여척의 함선중 350여척이 분파되거나 파손되어 기능을 상실하고 남은 150여척으로 탈출을 시도, 이들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 다달았을 때 왜군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쓰러지며 우리에게도 유명한 마지막 명령인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긴 채 전사한다. 그렇게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하고 유언을 지키기위해 무의공 이순신 또는 입부 이순신(충무공과 동명이인, 1553~1611)이 충무공의 갑주를 대신 입고 전장을 지휘한 결과 탈출하던 왜150여척의 함선중 100여척을 나포시키고 50여척만 겨우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

겨우 50여척의 배로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부산에 집결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는덴 실패하지만 고니시는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겨우 탈출해 부산쪽으로 와서 본국으로 철수에 성공하게 된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사실상 7년간의 긴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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