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
조선7대 세조가 자신의 조카이자 주군인 조선6대 단종의 왕위를 1455년 찬탈하고 이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다시는 벼슬을 얻지 않고 끝까지 절개를 지킨 6명의 신하.
배경
1453년(단종1년),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7대 세조, 1417~1468, 재위1455~1468)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절차를 밟고자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이 때 단종을 지키던 정승 영의정 황보인(1387~1453) 좌의정 김종서(1383~1453)등을 암살하여 정권을 장악해버린다. 이에 집현전을 중심으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대한 불만을 품은 자들이 많이 생겼고 집현전 출신 문신인 성삼문(1416~1456)을 중심으로 수십여명이 세조3부자[세조, 덕종(의경세자, 성종의 아버지), 예종]을 암살할 계획을 하는데...
이로하여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하였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기까지 절개를 지킨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이 있고, 생육신은 수양대군(7대 세조, 1417~1468, 재위1455~1468)의 왕위 찬탈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다시는 벼슬을 얻지 않음으로서 절개를 지켰다.
생육신역시 6명으로서 세조가 즉위한 1455년 벼슬을 버리고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조카 단종(1441~1457, 재위1452~1455)의 왕위를 찬탈한 행위를 비난하다가 나이가 들고 사망한다.
본관 | 생몰년도 | 비고 | |
김시습 | 강릉 | 1435 ~ 1493 | 은둔생활 후 승려가 됨 |
성담수 | 창녕 | ? ~ ? | 1456년 단종복위운동으로 붙잡혔을 때 고문당하고 3년 귀양살이후 풀려남 |
원호 | 원주 | 1397 ~ 1463 | 관직을 버리고 평생 은거 |
이맹전 | 벽진 | 1392 ~ 1480 | 벼슬에서 물러난 후 김종직과 학문에 전념 |
조려 | 함안 | 1420 ~ 1489 |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서 평생 은거 |
남효온 | 의령 | 1454 ~ 1492 | 벼슬에서 물러난 후 유랑생활 |
생육신 6인은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을 찬탈로 규정하고 [불사이군*]의 원칙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나 은둔, 은거를 하며 인생을 보낸다. 살아서 단종을 추모하면서 절개를 지켰다 하여 생육신이라고 불리고 후대에 칭송을 받는다.
*불사이군 : 두명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 충신은 한명의 임금만을 섬긴다.
사육신과 생육신
수양대군(세조)의 불법적 왕위 찬탈에 맞서 저항했다는 점에서 사육신과 생육신의 길은 같으나, 이후의 역사에서는 평이 각자 나뉘었었는데,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사육신과 생육신들에 대한 평가가 나오면서 절의를 제대로 평가받게 되면서 조정으로부터 시호를 받는등 명성이 높아지게 되면서 신하들로부터 추앙받기 시작한다.
서산서원
현재 경남 함안군 군북면 사군로1235번지에 있는 서산서원은 생육신 6명의 충절을 추모하기위해 1706년(숙종32년)에 세워졌다. 생육신중 한명인 조려(1420~1489)가 벼슬을 정리하고 고향인 함안으로 귀향하면서 독서와 함께 학문을 평생 닦으면서 단종의 명복을 빌며 1489년(성종20년)사망하기까지 자기수양을 하며 평생 절의를 지켜 이에 귀감이 된 후학들과 선비들에 의해 건립이 된 것이다.
1713년(숙종39년) 조선19대 국왕 숙종(1661~1720, 재위1674~1720)이 직접 '서산'이라고 사액을 내려 서산서원으로 정식으로 명칭이 주어진다. 생육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고, 사액된 이후 서산서원에서는 학문 강론과 더불어 유림들의 회합의 장소로 쓰이면서 유생들이 공부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하다가, 1871년(고종7년) 당시 고종의 섭정이던 흥선대원군(1821~1898, 섭정1864~1874)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