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대토벌 작전
일제가 1909년 9월부터 10월 말까지 대한제국 남쪽 3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최후저항을 했던 항일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세운 대토벌 작전으로 최종적으로 전라도 지방에 대한 소탕작전으로 신무기로 무장한 일제군에 철저하게 밀려 2달도 안되는 기간동안 2만여명에 가까운 의병들이 전사하고, 의병이 사실상 와해되는 결과가 초래되게 된다.
전개과정
I.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05년(광무8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게 넘어가게 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게 된다. 을사5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이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해버림으로서 국권의 수탈이 가속화된다. 을사늑약에분노한 최익현(1834~1907), 민종식(1861~1917), 신돌석(1878~1908)등이 을사의병을 일으켜서 일제에 대항하지만 일제군의 화력에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1907년(광무10년)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광무제(고종, 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가 강제로 퇴위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이에 반발한 해산된 군인들이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항일 의병에 합류하게 됨으로서 전국적인 의병활동이 벌어지게 된다.
심지어 이인영(1868~1909)은 당시13도의 수만여명의 의병을 통합해 한양 진공 작전을 계획하는등 활발하게 나아가지만 이인영의 부친상으로 해산되어버리고 이러한 행위에 일제는 항일 의병들을 잡으면서 북쪽에서부터 점점 전선이 밀려 대한제국 남부 3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까지 밀리면서 일제군은 남한 대토벌 작전이라는 의병세력 절멸을 위한 군사작전을 펼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09년 중반까지 충청도, 경상도지역은 일제에 의해 쉽게 진압이 되어버리고 전라도 지역만 남게 된다.
II. 대토벌 작전
일제는 그렇게 1909년 9월 1일, 육군 보병 2개연대병력과 경찰병력등을 합쳐 2천여명에 달하는 정규군을 투입해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전라도 지역에 대한 항일 의병 진압을 시행하게 되면서 사실상 대토벌작전이 시행된다. 일제의 1단계 작전은 현 전라북도 지역인 부안~남원~하동으로 이어지는 전선(봉쇄)을 설치하는 것, 2단계 작전은 고흥~광주~영광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지대 전선을 구축하는 것, 3단계 작전은 전선 사이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섬멸하기위한 섬멸작전 이였다. 이미 1909년당시 대한제국과 일제의 화력차이는 비교불가능한 수준으로 일제가 화력으로 우수했기 때문에 항일 의병들은 유격전, 매복작전이 아니고서야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을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났었다. 일제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고 민가에 방화를 저지르고 약탈하는등 온갖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함과 동시에 의병과 의병장들도 일제군에 의해 붙잡혀 순국하고 강제노역에 동원되는등 막대한 피해가 나온다.
III. 결과
그렇게 항일 의병은 사실상 궤멸상태에 다달으면서 무장 항일 세력은 와해되고 소규모 의병 조직들만 남게되어 가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완전히 일제에 넘어간 이후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이 활동하는 식으로 항일 운동이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