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안공근 암살 사건

Mintaka5 2025. 1. 3.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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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공근 암살 사건, 1939

 

 

배경

1939년 5월 30일,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관이자 재정 담당관이였던 안중근(1879~1910)의사의 막내동생 안공근(1889~1939)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현재까지도 암살의 배후는 알 수 없는 상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1876~1949)의 최측근이였으나, 형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후 가족이주문제와 자금문제로 갈등하던 상태였는데 1939년 형 안중근의 가족들과 안공근 자신의 가족들을 피신시키라는 김구 주석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안공근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김구의 어머니인 곽낙원(1859~1939)여사만 데리고 옴에 따라 김구 주석이 안공근을 질타하고 이후에도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데리고 오라는 명에도 자신의 가족들만 데리고옴에 따라 김구의신망을 잃었고 그런 상황일 때 실종된 것.

 

임시정부

1909년 형 안중근(1879~1910)의사가 하얼빈에서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10)을 암살하고 뤼순 감옥에 투옥되어있을 때 안공근은 형 안정근(1885~1949)과 함께 안중근 의사를 면회를 다니는등의 행보를 보이면서 형을 적극 변호하지만 결국 1910년 3월 26일 처형됨에 따라 러시아로 망명해 큰형의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행보를 보인다.

1919년 3.1운동 직후 4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하게 되면서 외교관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현지 조선인들과 함께 활동하고 국가 대사로서도 활동하고 임시국회인 의정원 의원을 지내는등 임시정부 내,외로 주요요직들을 거치며 임시정부를 움직이는 주요 인물중 한명이 되었다.

또한 안공근은 1931년 김구의 주도하에 항일 무장투쟁단체인 한인애국단 창단에도 참여한다. 당시 상해에 체류중이던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청년 수십명을 모아 창단하게 되는데 이 청년들중 이봉창*, 윤봉길*, 이덕주*, 유진만*등 직접적으로 의거를 하여 임무를 수행한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들이 나오게 된다. 

  생몰년도 비고
이봉창 1900 ~ 1932 당시 일본 천황 쇼와 덴노(히로히토)암살 미수, 교수
윤봉길 1908 ~ 1932 훙커우 의거 이후 처형
이덕주 1908 ~ 1935 조선총독부 총독 암살 임무, 이덕주는 1935년 해주형무소에서 옥사
유진만 1912 ~ 1966

 

 발단

한인애국단을 조직하면서 주 임무를 총괄, 주관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일제 고위급 인사, 친일파 인사등의 암살을 주관했다. 어찌저찌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중화민국과 접촉을 시도하여 장제스(1887~1975), 쑹메이링(1897~2003)등 중화민국 국민당 관계자들과 접촉, 교류해 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스스로 담당했다고 한다.  

안공근 본인의 집에 한인애국단 본부가 설치되었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등이 이곳에서부터 의거를 논하고 지원을 하고 여러 독립운동에관련한 모든 일들을 관장하게 되지만, 중화민국 국민당으로 부터 받은 자금을 사적인 목적과 도박등으로 탕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슬슬 독립운동가들이 안공근을 멀리하고 신뢰가 떨어지는 이야기가 주석 김구(1876~1949)에게도 알려지게 된다.  

 

김구와의 갈등

이후에도 1937년 장남인 안우생(1907~1991)과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하지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서 지역구에서 활동하기까지 하면서 여러 독립운동단체를 규합시키는 작업에 착수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김구 주석과 이시기에 갈라서게 되는데, 김구는 안중근(1879~1910)의사의 가족들과 안공근 본인의 가족들을 피난시키라고 지시하는데 김구의 모친인 곽낙원(1859~1939)여사만 데리고 나왔다는 점에서 안공근이 김구에게 절대충성하고있다는 느낌을 받게끔 한다.

이에 김구는 안공근을 크게 질타하고 꾸짖은 다음 다시 가족들을 모셔오라고 당부하는데 이번엔 안공근 본인의가족들만 데리고 나옴에 따라 또 꾸짖고 다시 안중근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라고도 또 당부하지만 데리고오지않는 바람에 김구는 안공근에게 돌아서게 되는 계기가 된다. 

 

실종

 1939년 5월, 중화민국 충칭에서 안공근이 실종되는 사건이벌어진다. 김구의 주치의였던 유진동(1908~?)이라는 의사의 집에서 지내며 자주 출입했던 안공근은 갑자기 행방불명된다. 현재까지도 안공근의 시신은 찾지 못한 상태이며 [백범일지]에 따르면 안공근은 1939년 5월 3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실종에 여러가지 설들이 난무한다. 일제의 스파이에게 암살을 당했다던지, 갈등하던 김구 주석의 측근에 의해 암살이 되었다는등 여러가지 설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기에 독자들의 생각에 맡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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