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 말소 사건, 1936
배경
1936년 8월 13일,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에서 당해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서 남자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1912~2002)선수와 3위를 차지하여 동메달을 획득한 남승룡(1912~2001)선수를 보도하면서 당시 일제의 자격으로 출전하여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 앞면 일장기를 삭제하고 보도한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사장 여운형(1886~1947)은 조간에 베를린 올림픽 남자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와 3위 동메달 획득자 남승룡 선수의 유니폼 앞에 달린 일장기 마크를 삭제한채로 기사를 내보내면서 이 기사에 조선총독부가 [동아일보]의 신문 발매를 중단시키고 이에 연루된 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연행해가고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9일자로 무기한 정간 처분을 받게 되면서 3가지 조항*을 가진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연행되어 고문을 받던 자들이 풀려나고 9개월 뒤인 1937년 6월자로 다시 운영된다.
*아래 표의3가지 서약서 조항
내용 | |
I |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을 것 |
II | 시말서를 쓸 것 |
III | 다른 사건이 있을 때엔 가중 처벌 받을 것을 각오할 것 |
발단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나치당이 1933년 정권을 잡고 처음으로 열게된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1936.08.01~1936.08.16)이 열리지만 국권을 이미 상실한 대한제국은 일제의 치하에서 선수단이 파견되게 된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 일제는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을 높이면서, 특히 언론활동이 크게 위축되면서 활동이 이전보다 위축되었었던 시점이였다.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등은 당시 일제의 철저한 검열속에서 발행기관으로서의 명목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마침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남승룡 선수가 마라톤에서 각각 1등, 3등을 거머쥐면서 금메달, 동메달을 획득하고 손기정 선수의 경우 당시 세계기록을 5분이나 앞당기게끔 하는 등 놀라운 성과를 보이게 되면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놀라워 하고 가슴벅차했다고 한다.
그렇게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등은 대대적으로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대회 우승소식을 연일 보도하면서 한반도에 널리 알리게 된다.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우승자로서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의 사진자료를 입수해 게재하게 되는데, 일제의 일장기 마크를 달고 사진을 찍은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그려져 있는 일장기를 삭제하여 개제하게 되는데, 당시 사진기술등이 빈약하고 어쨌든간에 통과가 되긴 하는데, 2번째 게재하였던 [동아일보]의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삭제하고 실은 기사는 결국 일제에 의해 발견되어 문제삼게 된다.
경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동아일보]관계자들을 연행하고 무기정간 처분을 내리게 되는데, 이들을 고문하여 심문하는 과정에서 [조선중앙일보]역시 일장기를 삭제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게재한 것이 발각되면서 수사의 대상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동아일보]사장이였던 송진우(1890~1945)를 포함한 동아일보 관계자들은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 일장기의 빨간색 부분을 하얀색으로 덧칠해서 지웠다는 혐의로 모진 고문을 가하게 되면서 사실상 와해된 [동아일보]는 송진우가 사장직을 사임하고, 연달아 아래직책 인원들까지 사임하고 고문을 당하던 [동아일보]관계자들은 더이상 언론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은 다음 풀려나지만, 조선총독부가 [동아일보]를 이 사건을 계기로 무기한 정간조치하게되면서 활동이 중단되게 된다.
이후
무기한 정간조치 이후 9개월여만인 1937년 6월 다시 [동아일보]가 간행되기 시작하지만, 1940년대들어 태평양전쟁, 조선어 말살정책등 더욱 높은 등위의 탄압을 이어가는 일제에 의해 언론사에서는 한글로된 신문을 발행할 수 없어서 결국 일제 총독부에 의해 한국어 신문은 총독부가 관리하는 [매일신보]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폐간을 강요당하게 되면서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폐간당하게 된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군에 의해 무조건항복을 하게되면서 패망하게 되면서 조선이 독립국이 됨에따라 다시 활동이 재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