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촌 사건, 1920
배경
1920년 4월,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에서 일제군이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
1917년 10월, 러시아 제국에서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의 지도 하에 카를 마르크스 사상(1818~1883)에 입각한 볼셰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러시아 내전(1917~1922)이 발발함에 따라 일제는 러시아 시베리아로 군대를 파병하는데, 파병의 목적과 명분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였지만, 일제는 출병 후 레닌의 볼셰비키파와 대립하는 계열인 율리 마트로프(Julius Martov, 1873~1923)의 멘셰비키에 지원을 하면서 러시아의 내전을 부추겼다.
이후 1920년에 들면서 볼셰비키파의 우세가 점쳐지면서 일제군이 밀리게 되면서 점점 밀려나다가 우수리스크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들을 볼셰비키파 군대(붉은 군대)가 사망케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빡친 일제는 즉시 보복공격을 단행코자 하는데 하필 연해주의 조선인들이 볼셰비키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일제는 이를 트집잡아 1920년 4월 5일 조선인 마을 신한촌에 있는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펼치게 된다.
내용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일제는 강압적으로 탄압함과 동시에 주동자들을 색출해 근원을 찾고자 했는데, 3.1운동이후 러시아, 만주 국경지역으로 많은 운동세력들이 이동해 항일 투쟁운동을 전개함에 따라 일제는 조선땅이 아닌곳에서 작전을 전개할 시 국제적으로 욕을 먹을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상당히 이들을 껄끄럽게 여겨온다.
그리하여 1919년 여름부터 일제군은 조선과 만주, 러시아 국경지대쪽에 있던 항일운동 세력들을 대량으로 잡아들여 일망타진하고자 하는데, 마침 당해 9월 강우규(1855~1920)의사가 사이토 마코토(1858~1936)신임 조선총독부 총독을 향해 날린 수류탄으로 인해 강우규의 소속인 블라디보스토크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직을 토대로 조사를 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시노다 지사쿠(1872~1946)를 만나 정보를 얻고 당시 일제 총리 하라 타카시(1856~1921)에게 연해주, 만주지역을 통제해달라는 요구를 하여 국경지대엔 일제군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다.
니콜라옙스크 사건
그렇게 수개월간의 병력 정비를 한 일제군은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작전을 수행하지만 속뜻은 항일 조선인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있었다. 마침 미군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 재임1913~1921)의 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미국본토로 철군을 한 상태였고..
그러나 볼셰비키군(붉은 군대)와 협정을 체결해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1920년 3월이 되자마자 볼셰비키군은 하루에 수십명을 살해하고 특히 민간인들까지 학살하며 일제군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최후통첩을 하지만 일제군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르주아들에 불만이많았던 볼셰비키군은 기업가, 노동자 할것없이 학살하고 일제군도 자비없이 공격한다.
신한촌 학살
일본인들 자체가 부르주아성향을 가진 계층이라고 인식한 볼셰비키군은 일제군과의 일전까지 거듭하면서 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하지만, 1920년 4월경 일제군이 일제히 볼셰비키군을 공격하게 되면서 이들은 큰 타격을 입어 우수리스크지역까지 밀려나게되면서 일제군은 본래의 목적인 항일 세력들을 소탕하기위한 작전에 돌입하면서 신한촌 한인 마을에 무차별로 총을 들고 민간인들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300여명에 달하는 신한촌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고 일제군들은 살아있는 조선인들을 산채로 묶어 블라디보스토크 바다에 던져 죽이는등 만행을 저지른다.
신한촌에서 지도자격으로 위치해있던 최재형(1858~1920), 김이직(1875~1920), 엄주필(?~1920), 황경섭(?~1920)등이 일제군에 의해 암살당하고 연해주지역에서 항일세력 100여명이 체포되는등 항일세력이 일제에 의해 꺾여버린다.
이로서 일제군은 연해주일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하고, 항일세력과 더불어 사회주의 세력들까지 모두 와해시키고 친일단체를 세워 직접 통치를 일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