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신, 1515~1590
재임기간 | 군주 | |
79대 영의정 | 1585. 05 ~ 1588. 06 | 선조18년 ~ 선조21년 |
출생
1515년 조선 경상도 상주(현 경북 상주시)에서 아버지 노홍(1496~1568)과 어머니 성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조선 중기때 활동한 성리학자. 사림파이며, 이연경(1484~1548)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1543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이후 조정에 들어오지만 들어오자마자 1545년 을사사화,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20년에가까운 시간을 유배살이를 하다가 1567년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즉위하고 유배가 풀려 다시 기용되어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운이없겓도 1589년 영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있을 당시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게 되면서 과거 노수신이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만으로 삼사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지만 선조는 노수신을 명예직인 영중추부사직을 파직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짓고 살린다. 이후 75세로 사망.
과거
태어난 고향은 경상도 상주(현 경북 상주시)이지만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일찍이 가서 자랐다고 한다. 이연경(1484~1548)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는데, 이연경은 사림으로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이다. 1531년(중종25년)에는 이연경의 딸 광주 이씨와 혼인하게 된다.
1534년 19세일 때 사마시에 3등으로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가서 학문을 닦다가 1543년 식년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첫 관직으로 정6품에 해당하는 성균관 전적이 된다. 이후 학자의 보직이라 할 수 있는 홍문관, 시강원등에서 사서직을 맡게 되는데 당시 세자인 인종(1515~1545, 재위1544~1545)을 같이 강론하면서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학자 친구가 생기게 되는데 그이가 바로 이황(퇴계, 1502~1571)이다.
베팅실패
I. 인종 시기
1544년 중종(1488~1544, 재위1506~1544)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인종의 외삼촌(인종 어머니 장경왕후의 오빠)인 대윤 윤임(1487~1545)이 정권을 잡고 사림파를 등용하면서 노수신역시 정언(정6품)으로 임명되고 이후 핵심요직인 이조좌랑, 정랑등을 역임하면서 사림파를 많이 등용해 잘 나가나 싶었지만..
II. 명종 시기
1545년 인종(1515~1545, 재위1544~1545)이 즉위1년도 채 되지않아 갑작스럽게 승하해버림으로서 인종의 이복동생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이 즉위하게 되는데 11세에 불과한 나이로 인해 어머니인 문정왕후 윤씨(1501~1565)가 수렴청정을 하게되면서 문정왕후의 남동생이자 명종의 외삼촌인 소윤 윤원형(1503~1565)이 정권을 잡게됨에따라 대윤을 숙청하는 을사사화(1545)를 일으키게 된다.
이에 사림이 주축이였던 대윤측 인사들은 숙청되고 이조정랑(정5품)직을 맡고있던 노수신 역시 유배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2년뒤인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실상 대윤의 씨를 말리겠다는 소윤 윤원형의 의지에 얼마남지않은 대윤측 인사들이 숙청당하고 충주에 유배가있던 노수신역시 죄가 가중되어 더 멀리 전라도 진도로 배소지가 옮겨지게 된다. 이 진도에서 노수신은 19년이라는 세월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소윤 몰락
훈구파 대신이였던 소윤 윤원형은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을 통해서 대윤의 씨를 말려버리고 사실상 20년간 절대권력을 누리는데 그 배경에는 누나인 문정왕후가 서있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했는데, 게다가 명종은 어머니와 외삼촌의 그늘에서 제대로된 권위를 누려보지도 못한 억누름이 굉장히 심한 상태였는데, 명종이 나이가 들면서 왕권강화를 위해 점점 외삼촌 윤원형을 견제하고자 했는데 마침 1565년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윤씨(1501~1565)가 서거해버리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윤원형의 최측근으로부터 삼사대간의 탄핵이 이어지게 되면서 그 화살이 당시 영의정이였던 윤원형에게까지 이어진다. 이 때에도 노수신은 진도에 유배생활 중이였는데 1565년 유배지에서 풀려나게 된다.
선조
1567년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이 승하하고 중종의8남 덕흥대원군(1530~1559)의 3남 하성군 이연이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로 즉위한다. 선조는 유배에서 풀려나고 대기중이던 노수신을 영의정 이준경(1499~1572, 영의정재임1565~1571)의 추천으로 홍문관 교리(정5품)에 임명시킨다.
1568년 노수신의 아버지 노홍(1496~1568)이 사망하면서 경상도 상주로 내려가서 3년상을 치르는동안 선조는 기다렸다가, 3년상을 치르고 다시 온 노수신을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대사간에 임명한다. 이제 남은 어머니를 간병하기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노수신은 대사헌(종2품)직을 그만두고자했는데, 선조는 그럼 병든 어머니를 한양으로 모시고 와서 간병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면서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 노사신은 정2품 판서에 다달았고, 1573년 우의정*(정1품), 1578년 좌의정*(정1품), 1585년 영의정*(정1품)에 이르게 된다.
*의전서열로 따졌을 때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순.
말년과 기축옥사
노수신은 1588년 영의정으로 재임하고 있을 시 나이가 73세에 달했는데, 고령을 이유로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대신 선조가 명예직인 영중추부사에 그를 올린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말년에 이게 왠일이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며.. 노수신이 과거에 정여립(1546~1589)을 천거했던 일이 있어 노수신이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삼사대간의 탄핵을 받는 말년에 위기가 찾아오지만, 선조가 노수신을 많이 아꼈었던 걸까 명예직인 영중추부사직을 파직하는 차원에서 노수신을 풀어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노수신은 그렇게 고향으로 와서 1년만인 1590년(선조23년) 75세의 고령으로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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