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 1588~1652
재임기간 | 군주 | |
118대 영의정 | 1646 ~ 1649 | 인조23년 ~ 인조26년 |
출생
1588년 조선 전라도 낙안(현 전남 순천시)에서 아버지 현감 김탁(?~?)과 유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다가 배신한 김질(1422~1478)의 5대손.
서인이며 문,무에 능통한 인물로서 1623년 인조반정때 이귀(1557~1633), 김류(1571~1648)등과 함께 인조편에서서 도왔던 반정공신이자 유능한 관리. 이괄(1587~1624)이 인조반정때 논공행상의 불만을 품고 이괄의 난(1624)을 일으켜 위기가 닥쳤을 때 관련될 인물들을 미리 정리하는등 효과적으로 도모하여 사건의 확산을 막았지만, 1636년 평안도에 도원수로서 군 정비로 파견가있을 때 병자호란이 닥치지만 크게 패배하고 호란이후 책임을 지고 유배된다.
이후 1639년 유배가 풀리고 부윤, 판서, 우의정등에 임명되고 1646년 정1품 영의정에 오른다. 청나라의후원으로 권력기반을 잡아 임경업(1594~1646)등을 죽게 하고 1649년 인조(1595~1649, 재위1623~1649)가 승하하고 효종(1619~1659, 재위1649~1659)이 즉위함에 따라 김자점의 반대파들이 다시 조정에 들어옴에 탄핵을 받아 1650년 유배형에 처한다.
그러나 김자점은 이에 그치지 않고 역관 이형장(?~1651)을 시켜 청나라에 효종이 청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고변을 하여 청군이 조선에 와서 조사를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유배되지만 이듬해 1651년 아들 김식(1620~1651)이 군대를 동원해 중신들을 제거하고 숭선군(1639~1690)을 옹립시키려는 역모가 드러나게 되면서 처형된다.
관리
음서로 관리가 되어 이후 딱히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한 경력은 없다. 어릴때부터 비상한 머리로 실무행정부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 특히 군사행정에 있어서는 대체할 자가 없었을 정도.
인조반정
1618년(광해군10년)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이 인목대비(1584~1632)를 폐서인하면서 김자점은 서인측 인사들과 힘을 모아 폐비론을 주장한 대북파에 맞서지만,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쫓겨난다. 이후 최명길(1586~1647), 심기원(1587~1644)등과 힘을 모아 1623년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즉위시키는데 이가 바로 조선 16대 인조이다. 김자점은 53명의 공신중 1명으로서 1등공신에 책록되고 반정이후 인사권을 장악하고, 남인출신 이원익(1547~1634)을 영의정으로 추천하는 등 연립정부를 구성하게끔 하지만 사실상 서인이 정국을 휘어잡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이괄의 난
1624년 승지 시절, 인조반정에 공이있던 이괄(1587~1624)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김자점은 이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수십명에 달하는 관계 인사들을 처형하게끔 하고 사태가 크게 확대됨을 막긴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이괄의 세력이 파죽지세로 수도 한양근처까지 다달으게 되자 인조를 모시고 피란을 가게 된다.
이괄의 군대는 수도 한양에 입성해 흥안군(1598~1624)을 옹립시켜 그 세를 곤고히 하고자 하지만, 이괄의 군대가 안령(현 경기도 안산 일대)에서 대패하면서 군사가 흩어짐에 따라 이괄은 부하에 의해 살해되면서 반란이 마무리 된다. 그러나 한윤, 한택 형제가 후금에 투항해버리면서 앞으로 닥칠 호란의 명분이 되어버린다.
정묘, 병자호란
오랑캐와 싸웠다는 전쟁이라는 뜻인 호란이 1627년, 1636년 발생하는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김자점이 인조를 강화도로 호송하여 다행이도 정묘호란이 경고성으로 마무리됨에 따라 인조 호송의 공으로 종1품으로 승차하고, 1633년 도원수에 임명되지만 1636년 홍타이지(1592~1643, 후금재위1626~1636, 청재위1636~1643)의 후금군 10만이 조선으로 쳐들어오면서 병자호란이 발발함에 따라 평안도로 나가있던 김자점이 후금군을 막고자했지만 토산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이후 1637년 병자호란이 끝난 후 도원수로서 책임을 지고 유배형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1639년 인조의 특명으로 유배령이 해제되고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 다시 관직에 복귀한다.
심기원의 옥사
유배형이 끝나고 관직에 복귀한 김자점은 계열세력다툼으로 다시 분열기를 거치는데, 특히 친청세력이였던 김자점은 반청세력이였던 이귀(1557~1633)세력과 대립하면서 동시에 좌의정 심기원(1587~1644)이 이귀세력에 붙으면서 대립이 표면화 된다.
채문형이라는 점쟁이가 심기원을 선동하여 심기원이 인조를 상왕으로 몰아내고 회은군(이덕인, ?~1644)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심기원의 부하 중 황헌(?~?)이 이를 밀고하게 되면서 심기원일파가 모두 붙잡혀와 국문을 당하는데, 김자점은 이 기회를 통해 심기원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반청세력을 제거하고자 하는 기회로 삼게된다.
현재까지도 어떤 이유로 심기원이 반란을 주동했는지는 알 수 없고, 대부분은 김자점이 내용을 조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여튼 이로서 심기원과 그를 사주한 채문형, 덩달아 의심받던 신하들 모두 처형이 이루어지고 심기원측 반청세력 수장인 최명길(1586~1647)이 실각하고 김자점의 독점체제가 이어지고 이사건 이후 김자점은 정1품 좌의정이 된뒤 1646년 정1품 영의정에 오르게 된다. 영의정이 되고 난 뒤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나간다.
세자빈 강씨
소현세자(1612~1645)의 세자빈인 민회빈 강씨(1611~1646)은 1637년 병자호란이 끝나고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8년간 인질로 가있다가 1644년 조선에 다시 돌아오지만 인조는 세자와 빈을 냉대하기에 모자라 1645년 소현세자가 의문사하고도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는데 1646년(인조23년)인조의 수라에 독이 발견됨에 따라 인조는 강빈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사사하고자 하는데 누명을 쓴 강빈을 김자점만이 사사하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강빈이 사사되고 이 과정에서 김자점을 따르던 세력들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한다.
옥사와 처형
1649년 인조(1595~1649, 재위1623~1649)가 승하하고 봉림대군이 효종(1619~1659, 재위1649~1659)으로 즉위하게 되면서 김자점은 삼사 대간의 탄핵을 받는다. 이미 세자빈인 강씨의 옥사를 날조하여 죽인 것으로 받아들인 대신들은 김자점을 피했고 이에 모두같이 김자점을 탄핵하기에 이르는데 효종도 어쩔 도리가 없어 파직하고 유배형을 내린다.
그런 와중에 1651년 김자점의 사돈 소용 조씨(1619~1651)가 효종과 장렬왕후(1624~1688)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이에 관련된 자들이 잡혀들어오고 이 과정에서 김자점까지 혐의가 튀게 되면서 김자점의 아들 김식(1620~1651)과 김자점이 모반을 꾀했다는 고변을 효종에게 올림에 따라 김자점은 아들과 함께 처형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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