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원, 1526~1592
출생
1526년 아버지 이학정(?~?)과 어머니 동래 정씨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대 1556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대에 주로 활동하던 관리. 전주 이씨 왕족 출신으로서 2대 정종(1357~1419, 재위1398~1400)의 7남 선성군(1392~1460)의 4대손이다.
1563년(명종18년) 명나라 서장관으로서 종계변무사로 임명되어 명나라로 가서 [태조실록], [대명회전]등에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1392~1398)의 아버지가 고려말기 권신 이인임(1312~1388)으로 잘못 기재되어있는 것을 이성계의 친부인 이자춘(추존 환조, 1315~1360)으로 수정하고 돌아오는 공으로 총애를 받게 된다.
관리
이양원은 퇴계 이황(1502~1571)의 문하로 수학하여 1556년(명종11년) 30세의 나이에 알성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관리가 된다. 특히 이양원의 주목받을 행보는 1563년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보내질 서장관에 임명되었다는 건데, 조선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1392~1398)의 부친이 이자춘이아닌 고려의 권신 이인임으로 잘못 기재되어있다는 걸 수정하기위해서 명나라로 간다. 이 임명은 이미 서장관으로서 종계변무사로 이전에 파견되어갔던 예조참판 김주()가 병을 얻어 명나라에서 사망함에 따라 이양원이 김주의 공석을 대행하기위해 떠난 것.
어찌되었든 이양원은 노력끝에 [태조실록], [대명회전]에 잘못 기재되었던 내용을 수정하는데 성공하고 조선에 돌아와 명종이 크게 기뻐해 이양원을 치하하면서 요직에 앉히고 선조23년인 1590년, 광국공신 3등에 책록고 정1품 우의정에 발탁하기에 이른다.
중간급 주요 요직이라 할 수 있는 이조정랑(정5품), 도승지(정3품 당상), 참의(정3품 당상), 부제학(정3품 당상), 관찰사(종2품), 대사헌(종2품), 판서(정2품), 대제학(정2품), 좌찬성(종1품)을 거쳐 정1품에 해당하는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이른다.
임진왜란
1592년 봄, 부산진에 왜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가 상륙하면서 보름도 안되는 시간에 부산진, 동래성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수도 한양으로 진격해온다. 이양원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유도대장으로 임명되어 도원수 김명원(1534~1602)과 함께 수도 한양의 수비를 맡지만, 이내 한강 방어에 실패해 한양이 점령당하고 북쪽으로 철수하면서 최대한 선조가 피란을 갈 수 있게끔 시간을 버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신립()이 이끄는 기마부대가 탄금대 전투에서 대패하고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현 북한 신의주시)에 피난을 가는데, 1592년 6월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이 분조를 이끌게 됨에 따라 이양원역시 분조군에 합세해 광해군과 부원수 신각(?~1592)등과 함께 해유령(현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에 주둔하고, 왜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개성으로 피란가는 선조를 쫓기 위해 2군 선발대 70명이 쫓아왔다가 모두 전멸하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이후 이양원은 좌의정에 임명된다.
자결
그러나 영의정에 임명된 직후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나서 명나라 영지였던 요동으로 피난을 가겠다는 요동내부를 하겠다는 의지가 천명되지만 결국 가진 않았는데, 이양원은 선조가 요동으로 이미 건너갔다는 소문을 듣고 제대로 보필못한 신하로서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단식을 결행해 8일만에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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