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inal Jules Raymond Mazarin, 1602~1661
출생
1602년 나폴리 왕국 페시나(Pescina)에서 아버지 피에르 마자리니(Pierre Mazzarini, 1576~1654)와 어머니 오르텐시아 부팔리니(Ortnsia Buffalini, 1575~1644)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배경
상공업자였던 아버지 피에르 덕에 넉넉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던 마자랭은 여느 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7살떄인 1609년 로마에서 예수회 교육을 받는데, 어릴때부터 뛰어나던 마자랭은 1618년 스페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헬리 혜성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고 종교연극에도 역할을 맡는등 독특한 행보를 보인다.
이후 외교력을 인정받아 교황대사의 비서로도 활동하다가 프랑스 총리대신인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 Richelieu, 1585~1642)를 만나러 프랑스로 가게 되는데 리슐리외의 눈에 띄게 된 마자랭은 이곳에서도 실력을 10분 뽐내면서 프랑스 국익에 도움이 되자 당시 프랑스 왕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 재위1610~1643)는 마자랭을 추기경으로 승진시키기위해 교황 우르바노8세(Urbanus PP. VIII, 1568~1644, 재위1623~1644)를 압박해 1641년 마자랭은 추기경이 된다.
이후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가 즉위함에 따라 루이14세의 모후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1666)가 섭정을 맡고 마자랭이 루이14세의 전반을 담당하는 수석국무장관이 되지만, 1648년 프롱드의 난이 1653년까지 섭정정부의 비판을 몸소 다 받다가 1653년 프롱드의 난이 종료되고 1654년 루이14세의 대관식을 랭스 대성당에서 열게 한다.
외교력
위 배경에서 설명한 것 처럼 예수회 교육을 받으면서 신학, 외교부분을 공부하면서 후에 1630년 만토바(Mantoba)왕위 계승을 둘러싼 프랑스-스페인간의 전쟁이 발발하고 전염병까지 발발함에 따라 프랑스가 비록 패배하지만 이 전쟁의 교섭인이자 교황 외교관으로 쥘 마자랭이 파견된다. 이 전쟁은 체라스코 조약(Traité de Chrasco, 1631)으로 마무리되면서 프랑스에 대한 국익을 어느정도 보장받게 된다. 루이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은 이에 크게 만족하면서 마자랭을 파리로 초청하여 대우를 해주는데,
1635년 30년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을 때 리슐리외가 스페인과 전쟁을 해야한다는 정책을 채택함에 따라 마자랭은 이에 교황청에 소환을 받게되는데 프랑스와 인연의 끈을 놓기 싫었던 마자랭은 교황청에가서도 프랑스의 국익을 어느정도 취할 수 있게끔 외교력을 발휘한다. 이에 루이13세의 인정을 받게되며 1638년 마자랭은 루이13세가 교황 우르바노8세를 압박해 마자랭을 추기경으로 승품시키게끔 하고, 이에 1641년 마자랭은 추기경에 승품되며 1640년 프랑스로 귀화하게 된다.
위기
I. 5살의 루이14세
1642년 총리대신 리슐리외(Richelieu, 1585~1642)가 사망함에 따라 마자랭이 루이13세의 총리대신이 된다. 그러나 1643년 5월 루이13세가 승하함에 따라 5살에 불과한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가 즉위함에 따라 루이14세의 모후인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1666)가 섭정이 됨과 동시에 마자랭은 수석국무장관이 되어 프랑스 정부를 안정시키기위해 안 도트리슈와 협력하게 된다.
II. 프롱드의 난
1648년 부르봉 왕조에 반대하는 귀족 세력이 내란을 일으키는데 이를 프롱드의 난이라고 한다. 프롱드는 당시 파리의 어린이들이 관리들에 반항해 돌을 던지는 놀이에서부터 비롯한 말. 1648년에 일어난 프롱드의 난은 1649년까지 지속되며 고등법원의 프롱드라고 하는 1차 프롱드의 난, 1650년에 일어나 1653년까지 지속된 프롱드가 2차 프롱드의 난이다.
II-1. 1차 프롱드
1648년 마자랭이 정권을 잡을 때 파리의 고등법원이 루이14세를 대신해 칙령을 내린 마자랭의 명을 거부하여 발생하게 된다. 이에 루이14세 가족과 마자랭등은 파리를 빠져나갈정도로 심각했는데, 다행이도 명장인 혈통친왕 콩데공작 루이2세(Louis II de Bourbon Condé, 1621~1686)가 난을 진압함에 따라 안도를 하나 싶었는데, 마자랭이 콩데 공작과 뜻이 맞지않아 콩데 공작이 체포됨에따라 안그래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전쟁이 마무리되고 프랑스로 복귀하던 콩데의 군대가 파리를 포위함에 따라 민중을 선동하다가 겨우 협상을 벌여서 마찰을 끝낸다.
II-2. 2차 프롱드
1650년, 귀족들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기위해 마자랭을 제거하기위한 음모를 꾸미는데 이를 알고 대비하고있던 마자랭은 콩데 공작, 콘티 공작, 롱그빌 공작등을 체포하는데, 최측근이라 생각했던 튀렌 자작(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Henri de la Tour d'Auvergne, 1611~1675)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로서 루이유 화의(La paix de Ruil, 1649~1650)가 끝나게 되면서 프랑스에 다시금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게다가 튀렌 자작이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의 도움을 받고자 군대를 끌어오는데 마자랭은 남부 프랑스에 벌어진 반란도 진압해야하는 입장에서 양쪽에 전선이 만들어짐에 따라 후퇴한다.
그러나 프랑스 내분에 돈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스페인 왕 펠리페4세(Felipe IV, 1605~1665, 재위1621~1665)가 마음에 들지 않아 튀렌 자작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된다. 그렇게 한층 더 작전이 어려워진 튀렌 자작은 이후 군대를 이끌고 왕당파군에 대항하다가 패배하여 무너지면서 결국 1651년 4월, 13세의 어린 왕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에게 용서를 빌어 용서받게 된다. 후퇴를 하다 망명까지가게된 마자랭은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1651년 12월 마자랭이 군대를이끌고 프랑스로 다시 돌아오면서 다시 내전이 벌어지는데 튀렌 자작과 콩데 공작간에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튀렌 자작은 루이14세의 군대를, 콩데 공작은 스페인 연합군을 이끌게 되면서 대립을 이어나가지만 파리의 시민들의 지지를 제대로 얻지 못해 우왕좌왕하면서 지친 파리 시민들은 1653년 마자랭이 파리로 돌아오면서 지지를 얻게 됨에 따라 왕당파군이 반란군들을 진압하면서 5년간의 프롱드의 난이 마무리 된다.
사망
1654년 루이14세의 대관식을 랭스 대성당에서 거행하고 왕권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루이14세에 충성하는 측근들을 기용시켜 프랑스를 다스리는 근간을 마련해주다가 1661년 58세의 나이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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