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Bourbon, 부르봉

마리 드 메디시스

Mintaka5 2024. 12. 9.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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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de Médicis, 1575~1642

마리 드 메디시스,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75년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에서 아버지 프란체스코1세 데 메디치(프:François Ier de Médicis, :Francesco I de' Medici, 1541~1587, 재위1574~1587)와 어머니 엘레오노르 데 메디치(프: Jeanne d'Autriche, 이:Elanor de' Medici, 1547~1578)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프랑스의 왕비.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4세(Henri IV,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의 왕비로서,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했기에 궁정생활이 외로워 보석구매등으로 사치를 부리기에 이른다. 루이13세,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크리스틴 마리 드 프랑스, 니콜라 앙리, 가스통 도를레앙, 앙리에타 마리 드 프랑스의 어머니다.

  프랑스어 생몰년도
(재위기간)
비고
루이13세  Louis XIII 1601 ~ 1643
(재위1610~1643)
프랑스 왕, 부르봉 왕조 2대 군주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이사벨 데 보르본)
Élisabeth de Bourbon
(Isabel de Borbón)
1602 ~ 1644 스페인 왕비, 1621년 펠리페4세와 혼인
크리스틴 마리 드 프랑스 Christine Marie de France 1606 ~ 1663 1630년 사보이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1세와 혼인
니콜라 앙리 Nicolas Henri 1607 ~ 1611 오를레앙 공작, 4세로 사망
가스통 도를레앙 Gaston d'Orléans 1608 ~ 1660 형 니콜라 앙리 사후 오를레앙 공작 승계
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 Henriette Marie de France 1609 ~ 1669 잉글랜드 왕비, 1625년 잉글랜드 왕 찰스1세와 혼인

 

 

프랑스로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에서 유년기를 보내는데, 1600년 프랑스 왕 앙리4세와 결혼하기 전에부터 혼인얘기가 나오는데 이미 프랑스는 1500년대에 메디치 가에 많은 빚을 져 부채가 많이 있던 터라, 앙리4세가 마리 드 메디시스와 혼인하기 전 조건으로 15만 파운드의 결혼지참금과 부채탕감등을 제시해 성사되면서 마리가 프랑스로 오게 된다. 

앙리4세는 호색한(Le Vert Galante)이라는 별명을 가진만큼 여성편력이 어마어마했는데 자존심 쎄고 질투심까지 강한 마리에게 있어서는 용납이 되지않아 자주 싸웠고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이후 1601년 루이13세를 포함한 왕자들을 여럿 낳게 되면서 입지도 올라가고 앙리4세의 사랑까지 받을 수 있게되어 생활이 평화로워지나 싶었지만..

 

청상과부, 섭정

남편 앙리4세가 1610년 5월 14일 카톨릭 광신도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 1578~1610)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어버리면서 마리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게 된다. 어찌저찌 남편 앙리4세 승하 후 장남인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 재위1610~1643)가 즉위함에 아직 9세에 불과했던 루이13세를 대신해 모후로서 마리가 섭정통치를 하게 된다. 

그러나 마리는 재상(콘치노 콘치니 총리), 보좌관등을 프랑스인이 아닌 이탈리아 출신을 올려놓고, 카톨릭 신자로서 다시 위그노들과 차별을 두기 시작하면서 36년간의 긴 위그노 전쟁(1562~1598)을 끝으로 남편이 내린 낭트칙령(종교 자유)이전으로 복귀시킨다.

 

아들의 쿠데타

그렇게 마리는 프랑스에서 대왕으로 칭송받던 남편 앙리4세가 행해왔던 정책들을 죄다 파기하고 다시 프랑스를 혼란에 빠뜨리게 됨에 따라 점차 장남 루이(루이13세)와 콩데공작 앙리(Henri II de Bourbon, Prince de Condé, 1588~1646)등 고 귀족들의 불만을 가져오게 되면서 특히 장남 루이는 1617년 공식적으로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할 수 있음에도 섭정직을 내려놓지 않는 어머니 마리를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인 콘치노 콘치니등을 비롯한 마리의 최측근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마리도 블루아성에 유폐됨에 따라 루이13세가 친정을 하게 된다.

 

가만있을줄 알았니 아들아

I. 1차 반란

그러나 권력욕이 강했던 마리는 1619년 블루아 성에서 탈출해 총애하던 막내아들 가스통 도를레앙(Gaston d'Orléans, 1608~1660)에게 가서 손잡고 루이13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만.. 허무할정도로 금방 진압되어버린다. 또 다시 패배한 마리는 더욱 복수심에 가득차 또 다른 반란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임에 따라 당시 총리대신이던 추기경 리슐리외(Cardinal Richlieu, 1585~1642)의 중재로 아들 루이13세와 화해하고 가스통 도를레앙이 유배를 가는 선에서 마무리가 된다.

 

II. 2차 반란

그러나 마리는 다시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서 2차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역시 1차 반란처럼 손쉽게 제압되어버리며 또 잡히지만 다시 루이13세가 리슐리외의 중재로 화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권력욕을 버리지 못해 루이13세에게 리슐리외를 내칠것을 요구하는데, 루이13세는 받아들이는 척 하다가 자기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루이13세와 다시 싸우게 되면서 적국 스페인령 브뤼셀로 도망친다. 외국에 가서 군대를 빌려 침공하겠다는 속셈이였는데, 이 또한 마리의 마음대로 성사되지 못해 망명하는 신세로 수년간 살아가다가 1642년 신성로마제국 쾰른 선제후국에서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저택에서 사망한다. 끝내 아들과는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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