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1537~1599
출생
1537년(중종31년) 조선 경기도 강화부(현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아버지 권철(1503~1578)과 어머니 창녕 조씨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남. 오성대감으로 알려진 이항복(1556~1618)의 장인이다.
배경
행주대첩을 이끈 장본인. 무반이아닌 문반으로 출사한 인물이다. 찬성사 권근(1352~1409)의 5대손.
생몰년도 | 품계, 직위, 기타 | ||
6대조 | 권근 | 1352 ~ 1409 | 종1품 찬성사 |
5대조 | 권제 | 1387 ~ 1445 | 종1품 우찬성 |
고조할아버지 | 권마 | ? ~ ? | 정2품 이조판서, 권근의 4남 |
증조할아버지 | 권교 | ? ~ ? | 종4품 양근군수 |
할아버지 | 권적 | 1484 ~ 1560 | 종3품 강화부사 |
아버지 | 권철 | 1503 ~ 1578 | 정1품 영의정 |
본인 | 권율 | 1537 ~ 1599 | 정2품 도원수 |
임진왜란당시 55세의 나이로 광주목사, 중위장, 전라감사, 도원수등으로 임명되어 왜군을 격퇴하는 선봉에 서게 된다. 1593년 그 유명한 행주대첩에서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와 겨뤄 대승을 거두며 임진왜란을 수행하지만 탄핵되고, 1596년 이몽학의 난 때 이몽학 반군을 섬멸시키는등 임진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마무리 짓게끔 노력하고 1599년 사망.
45세에 급제
권율은 무려 45세(1582년)에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해서 관리가 된다. 사치도 하지않고 유흥에도 관심없이 공부에만 매진하는데 40살이 넘어서도 계속 공부는 하는데 과거에 응시하지않아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어자피 음서로 진출할 수 있을만한 집안배경이 되어 권고를 받지만 것도 거부.. 그렇게 45살이 되어서야 가족의 등쌀에 못입어 과거를 치루는데 급제한 것. 급제하자마자 승문원정자가 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것도 이미 1580년에 사위 이항복(1556~1618)이 먼저 문과에 급제해서 관리생활을 하고있던 터라 비교대상이 되었기에... 장인은 놀고먹는다는 타박을 계속 받다못해 나간 것..
임진왜란
I. 이치전투
놀랍게도 무반이아닌 문반 출신이다. 임진왜란 발발직후 광주목사가되어 군병을 모집하는등 노력을 기울이지만 파죽지세로 밀고오는 왜군(당시 전국을 통일한지 얼마안된 시점이라 아직 싸움기술이 어마무시할 때)을 상대하기 역부족이라 판단들어 광주를 중심으로 군병을 모집하다가 동복현감 황진()과 합류해 이치(현재 전북 전주시)로 간다.
이곳에서 진을 치고 황진과 1천의 병력으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1533~1597)의 1만병력을 상대하는데 이 이치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를 하며 왜의 전라도 진격을 무마시키게 된다. 이 전투의 공으로 권율은 전라도 관찰사(종2품)로 승진한다.
II. 독왕산성 전투
1592년 12월 권율의 1만 부대는 독왕산성(수원 독산)에 주둔하는데 이곳이 물이 귀하다는 첩보를 입수한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1572~1655)는 이 독왕산성 주변을 에워싸 포위작전을 펼친다. 권율은 이 모든것을 다 아는상태에서 들어와 오히려 왜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펼치는데, 말에게 쌀을 쏟아붓고 씻기게하면서 왜군의 눈엔 물로 말을 씻기는 것처럼 보여 애초 물이 귀하다는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에 사기가 꺾여 포위를 풀고 후퇴하는 길에 권율은 기병 1천명으로 후퇴하는 왜군을 격퇴하여 3천의전사자를 내게 한다.
임진왜란 종료 후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는 권율의 이같은 병법을 높이 치하해 독왕산성에 말을 씻긴곳이라는 뜻의 '세마대'를 짓게 한다. 현 국철1호선 세마역이 이에 유래하게 된 것.
III. 행주 대첩
명군이 임진왜란에 투입됨에 따라 왜군에게 함락당했던 수도 한양을 탈환하기위한 조-명 연합작전을 펼치기 위해 적당한 위치로 행주산성이 채택됨에 따라 병력중 일부인 2500여명 정도를 데리고 행주산성으로 입성하게 된다. 거기다 승병장 처영(?~?)이 이끌고 온 승병 1천여명까지 다해서 3~4천여명의 군대를 정비시키는데 상대 왜군의 병력은 3만여명에 달했다.
왜군은 일단 최소 10배이상의 병력을 가지고있었기에 여러겹으로 행주산성을 포위해서 쉴틈없이 맹공을 퍼붓게 되는데, 권율은 이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식으로 화살, 불덩이, 바위, 끓는 물등으로 싸우고 물자가 부족해지게 되면서 부녀자들에게 돌멩이를 나르도록 해 전투에 보탬이되게끔 하는데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엔 무리였다.
거기다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등의 강력한 무기를 잘 숨겨놨다가 왜군이 한꺼번에 몰려왔을 때 이들을 사용해 통솔이 잘 되지않고 병력만 쏟아부은 왜군들을 쓸어버리는데 이 때 우키타 히데이에 또한 부상을 입고 전투지휘에 문제가 생기면서 엄청난 사상자(2만여명)를 낸채 퇴각하고 권율은 대승을 거둔다. 이 전투 이후 권율은 정2품 도원수에 임명된다.
IV. 애매함
그러나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1년전인 1596년,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탄핵을 받아 보직 해임 되었지만 선조의 신임을 얻고있던 터라 금새 재임명되면서 다시 도원수가 된다. 저 시기는 명과 왜간 강화 협상이 한창이던시기라 왜군을 선제공격 할 수도 없었고, 전쟁의 장기화로 명군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소극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명군에 의해 협조가 잘 되지않았다. 당해에 이몽학(?~1596)이 난을 일으켜 토벌명령이 떨어지게 되면서 이 때 바로 섬멸시키게 된다.
말년
1598년 12월 7년간의 긴 전쟁이 끝나고 병을 얻어 사직을 청하지만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윤허하지 아니하지만 1599년 병세가 더 심해졌을 때 쯤 허락을 받아 고향에 돌아가지만 1달여만에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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