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좌의정 정탁

Mintaka5 2024. 12. 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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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1526~1605

정탁,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26년(중종20년) 경상도 예천에서 아버지 정이충(?~?)과 어머니 평산 한씨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남.

 

배경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이순신을 죽이려고 할 때 상소를 올려 저지시켜 이순신(1545~1598)을 구명한 인물. 퇴계 이황(1502~1571)과 남명 조식(1501~1572)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다방면으로 능통한 수재형 인물로 심지와 지조가 굳고 인품이 넉넉해서 동인출신이지만 서인들과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발발 당시 종1품 좌찬성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송하고, 최대한 전쟁수행을 할 수 있게끔 현재도 거론되는 무관들을 천거하는등 다방면으로 임진왜란을 해결하기위해 노력하고 이후 좌의정에 재수되지만 사양한다.

 

관리

1552년 26세일 때 생원시에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간 뒤 1558년 32세가 되어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해 관리가 된다. 다양한 직책을 거치면서 행정능력을 익히고 능력을 인정받아 1568년(선조1년) 춘추관 기주관직을 맡을 때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한 이력도 있다. 

 

임진왜란

I. 전쟁 발발

1592년 4월, 왜1군 수장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가 이끄는 선봉부대가 부산진에 쳐들어오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부산진첨사 정발(1533~1592)과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이 전사하고 무관으로 꽤 높은 직책에 있던 명장 신립(1546~1592)또한 탄금대전투에서 전멸하면서 왜군들이 경기도까지 진격함에 따라 전쟁 발발 한달도 채 안된 보름만에 조선 정부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선조를 모시고 몽진하게 된다. 개성, 평양, 의주를 거치기까지 정탁역시 다른 중신들과 같이 선조를 보필한다. 

 

II. 무관 천거

정탁은 전쟁통에 무관을 천거해 공을 세우게끔 하는일에도 집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본관 생몰년도 비고
이순신 덕수 1545 ~ 1598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
곽재우 현풍 1552 ~ 1617 의병장, 홍의장군, 
김덕령 광산 1568 ~ 1596 의병장, 1596년 이몽학의 난으로 국문중 사망

 

III. 이몽학의 난

이몽학(?~1596)은 왕족인 전주 이씨 서얼출신이였지만 성품이 불량하고 행실이 좋지않아 아버지로부터 집에서 쫓겨났다. 그는 오랜전쟁과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간 선조에 대한 반감과 함께 피폐해진 조선 민심을 이용해 같은 서얼출신인 한현과 결탁해 거병을 하는데 이것이 이몽학의 난(1596)이다. 

 충청도 홍산, 임천에서 군수와 현감을 붙잡고 홍주성(현 홍성)을 포위하는데까지 성공하지만 홍주성 근방의 의병과 관찰사들이 와해시켜 이몽학은 탈출하지만 부하3명에 의해 피살된다. 문제는 체포된 반란주모자 심문과정에서 의병장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면서 붙잡혀온 한현이 김덕령, 최담령, 홍계남이 공모했다고 대답해버리면서 이들은 추국장으로 끌려와 추국을 받는다. 

정탁은 의병장 김덕령이 추국을 받을 때 선조에게 왜와 전쟁이 지속되고있는 이 시점에 섣불리 장수를 죽이면 민심이 흔들릴 수도 있으니 옥에 가둬놓고 진술을 확보해 신중히 처리할 것을 주장하지만, 의병장 김덕령은 끝내 인정하지 않고 추국중 사망한다. 최담령 역시 옥사하게 된다.

 

IV. 이순신과 신구의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1545~1598)이 한양에 압송되어와 옥에 갇힌다. 이전의 화려한 승전보가 전쟁이 고착화됨에 따라 승리소식이 없어지게되면서 마침 1596년 이몽학의 난으로 의병장까지 처벌될 때 선조는 이순신까지 의심을 하게 되는데, 마침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가 이순신을 이간책으로 고니시의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곧 부산에 도해하는 정보를 이순신에게 전달하는데 이순신은 이미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부산에 상륙한 것을 알았기에 거짓 정보라 믿고 공격을 하지 않는데, 이에 소극적인 태도를 가진 이순신의 태도가 의심스럽다며 대신들의 상소가 올라오면서 선조는 이순신을 보직해임하고 한양으로 압송을 명한다. 

이에 많은 대신들이 이에 우려를 표명하여 선조에게 이순신을 구명하는 상소를 올린다. 의병장 황대중(1551~1597), 이순신의 수하 송희립(1553~1623), 이조판서 이원익(1547~1634), 도원수 권율(1537~1599)등이 구명에 나서는데 당시 영의정 류성룡(1542~1607)은 어린시절 동네 친구라는 점에서 자신이 구명을 나서면 도리어 피해를 볼 것을 걱정해 선조의 눈치를 보던 틈에 판중추부사 정탁이 하나의 상소문을 올리게 된다.

신구의를 선조에게 올림으로서 대신들과 선조앞에서 "이순신은 명장이니 죽이면 아니되옵고 군사상의 이해득실은 먼 곳에서 판단하기 어려우니 이순신을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후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게 하소서"라 주청한다. 그렇게 이순신의 처형을 면하고 관직을 삭탈해 백의종군케 시키게 한다.

 

오류

많은 사람들이 정탁이 올린 상소를 신구차(논구이순신차)로 알고있는데, 정확하게는 신구의(이순신옥사의)가 맞다. 이는 1795년(정조19년)간행된 이충무공전서를 쓴 편찬관 윤행임(1762~1801)과 유득공(1748~1807)이 논구이순신차를 채택하면서 발생한 오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왜그랬는지는 윤행임과 유득공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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