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회니시비

Mintaka5 2024. 11. 1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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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니시비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1661~1720, 재위1674~1720)대에 있던 서인 내 사상분쟁. 간단하게 송시열과 윤증의 절교. 송시열은 충청도 회덕(현재의 대전)에 살았고, 윤증은 충청도 이산(현재의 논산)에 살았어서 회덕과 이산의 앞글자를 따서 회니시비라고 불려진다.

 

배경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과 송시열의 제자였던 윤증(1629~1714)은 1669년(현종10년) 아버지인 윤선거(1610~1669)가 사망하면서 스승 송시열에게 묘갈명(비문)을 부탁하게 되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사망하기전 윤증과 학문적문제 대립, 예송논쟁 당시 윤휴의 의견을 두둔하면서 이미 사이가 많이멀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한 비판적 내용(예를들면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비겁하게 살아돌아왔다던지..)을 써서 제자에게 보내져서 당황한 윤증이 고쳐달라고 부탁하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제지간의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등돌림).

 

신유의서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싹쓸이당한 다음해인 1681년 윤증이 송시열에게 편지를 한통 보낸다. 그는 스승 송시열에게 스승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이 편벽되어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라는 내용과 스승이 외치는 존명벌청(말로만 방법을 내세울 뿐 실익이 없다는 뜻)은 말로만 할뿐 실용적이지 못해 실익이 없다라는 내용을 써보낸다.

일단 윤증은 스승에게 보내기전에 박세채(1631~1695)에게 먼저 보여주는데 내용이 너무 강렬해 보내지말라고 권고하고 보내지 않기로 하고 박세채의 집에 편지가 있었는데, 하필 박세채의 사위이자 송시열의 손자인 송순석(?~?)이 장인어른 집에 왔다가 이 의서를 발견하고 몰래 송시열에게 전해지면서 치를 떨면서 제대로 빡이 친 송시열이 아예 윤증과 의절을 해버리고 송시열의 정치가 남인들에게 화살이 쏠리게 되면서 남인들이 대거 죽임을당하게 되면서 두 사제는 돌이킬 수 없는 정적이 되고 만다. 

1681년(숙종7년) 신유년에 쓰여진 편지라는 뜻에서 신유의서라고 함. 

 

분파

1684년(숙종10년) '신유의서'의 내용을 토대로 정치분쟁이 야기되는데, 윤증과 송시열의사이에서 편이 갈라지기시작하면서 서로를 비판하게 되는데 도저히 회복이 될 기미가 보이지않고 결국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게 된다.  윤증을 중심으로 소론,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이 형성되는 시점이 된다.

다음은 소론과 노론 분파의 중심적인물 목록.

  소론 노론
I 윤증(1629~1714) 송시열(1607~1689)
II 박세채(1631~1695) 김수항(1629~1689)
III 나양좌(1638~1710) 권상하(1641~1721)
IV 남구만(1630~1711) 민정중(1628~1692)
V 최석정(1646~1715) 김석주(1634~1684)
VI 박태보(1654~1689) 김익훈(1619~1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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