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조선의 붕당

Mintaka5 2024. 11. 18.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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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

정치적 사상,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당파집단을 일컬음.

 

배경

1560년대 외척으로서 권력의 정점을 찍던 훈구파 대신인 소윤 윤원형(1503~1565)이 1565년 누이인 문정왕후 윤씨(명종의 어머니, 1501~1565)가 서거함에 따라 몰락하고 사림이 다시 기용되면서 1567년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이 승하하고 재위에 오른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는 덕망이 높은 학자 집단인 사림을 대폭 기용하면서 문치주의형 정치를 이끌어가게 되면서 사림이 정계를 완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1575년 사림내에서 김효원(1542~1590)과 심의겸(1535~1587)사이에 막대한 권한을 가진 이조전랑()의 임명문제로 인해 대립이 일어나게 되면서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도성기준 동쪽 건천동에 있어서)과 심의겸(도성기준 서쪽 정릉방에 있어서)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나뉘게 된다. 붕당의 시작이다. 

 

붕당형성

1575년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분립되면서 붕당이 형성된다. 동인은 상대적으로 신진관리를 중심으로 한 당으로 발전하고, 서인은 기성세대 관리가 중심이 되면서 더욱 분열이 가시화된다.

  동인 서인
I 김효원 (1542~1590) 심의겸 (1535~1587)
II 류성룡 (1542~1607) 이이 (1536~1584)
III 이산해 (1539~1609) 성혼 (1535~1598)
IV 이발 (1544~1589) 윤두수 (1533~1601)
V 김우옹 (1540~1603) 정철 (1536~1594)
VI 허엽 (1517~1580) 박순 (1523~1589)
VII 정구 (1543~1620) 김장생 (1548~1631)

 

중재

율곡 이이(1536~1584)는 동인, 서인의 극단적 대립을 막기위해 조정책을 제시하며 붕당의 주 원인제공자 둘 김효원과 심의겸을 외직으로 내보내려고 하는데, 이 조치또한 대립의 여지가 되어버리며 오히려 지친 이이가 정계를 떠나버리고 중재자가 부재한 정계에서 더욱 대립이 극단적으로 진행된다.

 

기축옥사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이 발생하면서 동인과 서인이 폭발해버리는데, 정여립(1546~1589)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혐의로 정여립과 관련된 인물들을 일망타진하고 정여립이 자결함에 따라 마무리 될 것 같아보였는데,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1589)이 길삼봉(?~?)이 역모의 주모자이고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공모했다고 자백한다.

  생몰년도
김세겸 ? ~ ?
박연령 ? ~ ?
이기 1522 ~ 1600
이광수 ? ~ ?
변숭복 ? ~ 1589

자결한 정여립의 시신이 한양으로 이송되어와 목이 잘리고 능지처참된다. 이 사건에 대한 위관으로 정언신(1527~1591)이 임명되는데, 정언신이 정여립의 9촌뻘되는 친척임이 확인되어 위관자리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여론에 정철(1536~1594)로 교체된다. 정언신은 이후 조사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나 유배형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서인들은 정여립이 동인과 교류가 있었다는 점을 이용해 사건을 확대시키고 장기화되면서 수많은 동인들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동인들이 이때 대거 숙청됨에 따라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기축옥사는 1591년 5월이되어서야 마무리가 된다.

 

남인과 북인

1591년 서인의 정철(1536~1594)이 건저문제(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역린을 건드린 일로 정국이 다시 흔들거리는데, 기축옥사로 이미 서인에 악감정이 넘치던 동인내에서 정철의 처분논의과정에서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와 정철을 살리자라는 온건파로 의견이 나뉘게 되면서 의견차이가 좁혀지지 않자 결국 남인(온건파)과 북인(강경파)으로 또 갈린다.

  동인
남인 북인
I 류성룡 (1542~1607) 이산해 (1539~1609)
II 김성일 (1538~1593) 이발 (1544~1589)
III 우성전 (1542~1593) 정인홍 (1535~1623)

 

대북과 소북

임진왜란(1592~1598)이후 북인은 임진왜란 발발책임을 빌미로 영의정 류성룡(1542~1607)을 몰아내고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과 영창대군(1606~1614)지지를 두고 또 대북파(광해군)와 소북파(영창대군)로 나뉘게 된다.

  대북 소북
I 정인홍 (1536~1623) 유영경 (1550~1608)
II 이이첨 (1560~1623) 박승종 (1562~1623)
III 이산해 (1539~1609) 류희분 (1564~1623)

대북파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시켜 선조의 다음재위에 옹립시킴에 따라 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서출이였던 광해군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의 일을 벌인다.

그러나 대북은 또다시 권력다툼으로 골북(홍여순)과 육북(이산해)에다가 영창대군 거치문제로 골북과 육북이 영창대군과 인목대비(1584~1632)을 폐위시키는데 앞장서고, 영창대군 폐위를 반대하는 중북(정온)으로 갈리게 된다.

 

인조시기

I. 인조반정

1623년 서인과 남인이 연합해 인조반정을 일으켜 대북파는 모조리 숙청당하면서 정권에서 배제되거나 남인에 흡수된다. 서인들이 다시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그렇게 서인과 남인이 정계를 장악하지만 이미 서인은 광해군시절때 유력인물들이 죽거나 숙청되었기 때문에 원로급 인사가 없어서 남인측과 협치를 하면서 상호 견제를 하는데 오죽 서인에 인물이 없어서 남인의 대표인물 이원익(1547~1634)을 영의정에 올려놓는등 나름대로의 협치를 이끌어나간다.

II. 병자호란

그러나 1636년 후금 칸 홍타이지(1592~1643, 후금재위1626~1636, 청재위1636~1643)가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와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퇴로가 막혀 남한산성에서 49일간 농성을 벌이다 결국 항복을 하고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항복과 더불어 후금의 제후국이 되면서 인조의 왕권이 약해짐에 따라 대신들의 힘이 세졌는데, 심기원(1587~1644)과 김자점(1588~1651)이 번복하는데,

심기원은 소현세자(1612~1645)를 앞세워 1644년 인조가 정치를 잘 못해 인조를 상왕으로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하려던 계획이 발각됨에 따라 거열형에 처해지고 소현세자까지 의심을 받게 된다.

 

예송논쟁

소현세자가 병사하고 인조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1649년 효종(1619~1659, 재위1649~1659)이 왕이 되면서,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이라는 점을 착안해 1년상을, 남인은 왕이라는데 착안해 3년을 주장하지만 결국 서인이 승리하면서 1년상을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1차 예송논쟁이다.

2차 예송논쟁인 1674년, 효종의 왕후인 인선왕후(1619~1674)가 서거함에따라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이라는 점에서 자의대비(인조의 계비, 1624~1688)가 9개월간 상복을 입어야한다고 주장, 남인은 효종을 장자로 인정해 1년간 입어야한다고 함에 남인이 승리하면서 서인이 정계에서 축출된다. 

 

3차례환국

I. 경신환국(1680)

숙종(1661~1720, 재위1674~1720)대에 들어와 세차례의 환국이 일어나면서 남인과 서인은 서로 숙청을 함으로서 절대권력의 숙종을 향해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었다. 1680년 일어난 경신환국때에 유악(천막)문제로 숙종의 역린을 건드린 남인이 실각하면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서인 민유중(1630~1687)의 딸 인현왕후 민씨(1667~1701)를 중전으로 맞이함에 따라 더욱 권력을 공고히 한다.

 

II. 기사환국(1689)

그러나 1689년 소의 장씨(장희빈, 1659~1701)소생의 윤(미래의 경종, 1688~1724, 재위1720~1724)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에게 반대를 표명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을 포함한 서인들이 대거 숙청되어 남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서인 세력이였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비되면서 사가로 내보내지고, 희빈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아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에 실각한 서인들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소론 노론
I 윤증 (1629~1714) 송시열 (1607~1689)
II 남구만 (1629~1711) 김수항 (1629~1689)
III 박세채 (1631~1695) 권상하 (1641~1721)

 

III. 갑술환국(1694)

숙종의 3차 환국인 갑술환국은 1694년에 벌어지는데, 반역을 도모하던 신천군수 윤희(?~1694)와 별장 성호빈(?~1694)등이 희빈 장씨(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1651~1701), 민암(1636~1694), 오시복(1637~1716), 목창명(1645~1695)역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유생 김인(?~?)이 고변한다.

김인은 장희재가 당시 정4품 숙원 최씨(영조의 생모, 1670~1718)의 친척일가에 돈을 주고 최씨를 생일에 맞춰 음식에 독을 넣어 독살토록 사주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한다.

이에 억울함을 토로한 민암과 장희재를 오히려 위로하던 숙종이 다음날 바로 돌변해 집권당이였던 남인을 몰아내버리고 소론과 소규모의 노론을 기용시켜 남인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이과정에서 오빠와 연루된 중전 장씨가 정1품 빈으로 강등되고, 폐비되어 사가에 나가있던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된다. 

 

영조 탕평책

1724년 20대 경종(1688~1724, 재위1720~1724)이 승하하고 21대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가 즉위함에 그해 바로 영조는 당쟁의 폐단을 지적함과 동시에 탕평책을 펴게되는데, 노론과 소론사이의 화해와 당파에 상관없는 인재채용을 선언.  사실상 이때부터 극단적인 당쟁은 종료된다고 보면 됨. 

 

시파, 벽파

I. 정조시기

22대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대에도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탕평책을 그대로 계승하지만 살짝 다른성격의 탕평책인 준론탕평책을 시행. 그러나 정조의 당시로서는 진보적 정책에 찬성하는 시파와 반대하는 벽파로 당색이 또 갈리게 되면서 또 대립을 하게 된다. 

  시파(준론탕평 지지) 벽파(준론탕평 반대)
I 홍봉한 (1713~1778) 김귀주 (1740~1786)
II 홍국영 (1748~1781) 김상로 (1702~1766)
III 채제공 (1720~1799) 김종수 (1728~1799)
IV 김노경 (1766~1837) 심환지 (1730~1802)

 

II. 순조시기

1800년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가 승하하고 순조(1790~1834, 재위1800~1834)가 즉위하는데 10세에 불과했던 순조를 대신해 정순왕후 김씨(영조의 왕비, 1745~1805)가 1801년 천주박해인 신유박해를 통해 이를 빌미로 시파를 모두 숙청하고, 이후 수렴청정 종료 후 김조순(1765~1832)이 본인의 딸을 순조의 왕비(순원왕후 김씨, 1789~1857)로 삼으면서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세도정치가 수십년간 지속됨에 따라 붕당은 그 의미를 상실해버려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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