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1세 드 기즈(Henri Ier de Guise, 1550~1588)
출생
1550년 프랑스 주앙빌(Joinville)에서 아버지 프랑수아 드 기즈(François de Guise, 1519~1563)와 어머니 안 데스테(Anne d'Este, 1531~1607)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1519~1589)가 견제하던 기즈가문 출신으로, 위그노전쟁(1562~1598)중 카톨릭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점차 그 위세가 높아지는 인물. 카톨릭연맹(1584)의 수장이 되고나서 프랑스 왕 앙리3세(Henri III, 1551~1589, 재위1574~1589)와 나바라 왕 앙리3세(미래의 프랑스 왕 앙리4세,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등과 대립하는데 3명모두 앙리라는 이름을 가져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1588년 프랑스 왕 앙리3세의 음모에 빠져 블루아 성에서 암살당한다.
프랑수아 드 기즈
앙리 드 기즈의 아버지인 프랑수아 드 기즈(François de Guise, 1519~1563)가 1559년 프랑스 왕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의 마상창시합 도중 파편이 얼굴에 박혀 감염으로 승하하면서 즉위한 프랑수아2세(François II, 1544~1560, 재위1559~1560)가 즉위하는데, 프랑수아2세의 왕비 메리 스튜어트(Marie Stuart, 1542~1587, 재위1542~1567)의 어머니 마리 드 기즈(Marie de Guise, 1515~1560)가 자신의 누나였기에, 기즈 가문이 1559년부터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군인이였던 프랑수아 드 기즈는 잉글랜드로부터 칼레를 탈환시킨 프랑스 전쟁영웅에 동생인 추기경 샤를 드 로렌(Charles de Lorraine, 1524~1574)역시 프랑스 카톨릭계 수장으로서 가문자체가 프랑스 내에서 매우 영향력이 높았다. 그렇게 기즈가문을 필ㄷ두로 프랑스 국정이 운영되는데, 위그노의 국가였던 나바라 잔 달브레 여왕(Jeanne d'Albret, 1528~1572, 재위1555~1572)은 부군인 부르봉 공 앙투안(Antoine de Bourbon, 1518~1562)과 함께 기즈 가문을 공격할 계획을짜는데, 1560년 시행직전 발각되면서 관련자들이 처형되는데 이사건을 앙부아즈의 음모(La conjuration d'Ambois, 1560)라고 한다.
조카인 프랑수아2세역시 1560년 병으로 승하하면서 샤를9세(Charles IX, 1550~1574, 재위1560~1574)가 즉위하게 되면서 기즈가문은 세력을 크게 잃는다. 이후 프랑수아 드 기즈는 1563년 위그노에 의해 암살된 이후 13세의 나이로 기즈 공작이 된다. 계승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고 승계를 받았기에, 추기경이자 삼촌인 샤를 드 로렌(Charles de Lorraine, 1524~1574, 랭스대주교1538~1574)이 앙리의 교육을 담당하게된다.
청년
너무 어린나이에 공작이 되었기에 삼촌 샤를 추기경은 조카에게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전 유럽을 다니게끔 하고, 다녀온 뒤 군 경력까지 쌓게 해 앙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아버지 프랑수아 드 기즈가 했던 것 처럼 카톨릭 지도자들 사이의 리더가 되게 된다.
바르톨로뮤 대학살
1571년 가을, 지방에서 카톨릭계인 기즈 가문 지지자들과 위그노인 콜리니()지지자들 사이에서 종교간 충돌이 발생하는데, 동생인 추기경 샤를(1524~1574)은 이 긴장된 시기에 샤를9세(Charles IX, 1550~1574, 재위1560~1574)의 눈치를 보면서 평화를 받아들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데,
앙리는 바르톨로뮤 대학살이 일어난 1572년 8월 24일에 앙리의 아버지 프랑수아 드 기즈를 죽음으로 몰은 콜리니 제독을 치러 가고있었다. 이 장소는 프랑스 왕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1519~1589)사이에서 태어난 공주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마고여왕, Margurite de Valois, 1553~1615)와 위그노 국가인 나바라의 앙리3세(미래의 앙리4세, Henri IV,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와의 결혼식으로 카톨릭과 위그노의 화해의장이였던 장소에서였다.
기즈의 군대는 콜리니를 죽이고, 이와동시에 지방에서도 위그노교도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프랑스 전역에서 수만명에 달하는 위그노 희생자가 발생했다.
앙리3세
1574년 샤를9세가 승하하면서 샤를9세의 동생인 앙리3세(Henri III, 1551~1589, 재위1574~1589)가 즉위하면서도 앙리 드 기즈는 군인으로서 승전을 거듭하면서 위상이 높아진다. 위그노전쟁이 1572년 바르톨로뮤 대학살이후 격해지면서 대립을 하다가 1577년 휴전격인 베르주라크 평화조약(La paix de Bergeerac, 1577)을 체결하는데, 이후 상대적으로 앙리 드 기즈를 눌러야했던 앙리3세가 1580년대부터 3앙리(프랑스 왕 앙리3세, 나바라 왕 앙리3세(미래의 앙리4세), 앙리 드 기즈)간에 대립관계가 형성되면서 3명의 앙리가 전투를 벌인다 하여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불린다.
세 앙리의 전쟁
1584년 프랑스 왕 앙리3세가 왕위 계승권을 위그노인 나바라 왕 앙리3세에게 넘긴다. 이는 앙리3세를 다음을 이을 유일한 왕위 계승자였던 프랑수아 달랑송(François d'Alençon, 1555~1584)이 1584년 결핵으로 사망했기 때문인 것과 나바라의 앙리3세가 다음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정통성(살리카 법에 의거)과 더불어 발루아가문에서 더이상 계승할 수 있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 이 과정에서 앙리 드 기즈가 반발하게되면서 세명이 부딫히게 된다. 이는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위그노인 나바라에 넘어간다는것에 반발하게되면서 상당히 거센 저항으로 정세가 매우 불안정했는데, 당시 절대적 안정을 취하고자 했던 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1585년에 일단은 위그노의 자유를 폐기하는 느무르 조약(Le traité de Nemours, 1585)을 체결하지만 오히려 위그노의 반발을 부추기는 꼴이 되면서 다시 내전이 촉발하게 된다. 이 때 일어난 전쟁을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암살
그러나 앙리 드 기즈가 프랑스 왕 앙리3세보다 더한 신망과 지지를 받게 되면서 노골적으로 앙리 드 기즈가 왕권을 무시하는 등의 능멸한 태도를 보이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앙리3세가 1588년 12월 23일 블루아성(Château de Blois)으로 앙리 드 기즈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다고 속인 뒤 그가 앙리3세앞에 도착하기 전 왕의 침실앞에서 습격을 받아 칼을 맞고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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