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Valois, 발루아

프랑수아 드 기즈

Mintaka5 2024. 7. 18.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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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 de Guise, 1519~1563

프랑수아 드 기즈,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19년 로렌 공국 바흐르뒥(Bar-le-duc)에서 아버지 클로드 드 로렌 또는 클로드 드 기즈(Claude de Lorraine ou Claude de Guise, 1496~1550)과 어머니 앙투아네트 드 부르봉(Antoinette de Bourbon, 1494~1583)사이에서 태어남. 

어머니는 고위 귀족가문인 부르봉가문으로서, 그녀의 아버지 프랑수아 드 부르봉(François de Bourbon, 1470~1495)은 루이9세의(Louis IX, 1214~1270, 재위1226~1270) 6대손으로서 이후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시조 앙리4세(Henri IV, 1553~1610, 재위1589~1610)의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배경

원래는 프랑수아 드 로렌이였으나, 아버지 클로드 역시 군인으로서 당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1세(François Ier, 1494~1547, 재위1515~1547)치하 아래 1515년 이탈리아 지역 패권을 다툰 마르냐노 전투(La bataille de Marignan, 1515)와 1525년 농민반란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1528년 프랑수아1세로부터 '초대' 기즈 공작으로 서임되면서 프랑수아 드 기즈로 불리게 된다.

 

결혼

1548년 프랑수아는 이탈리아북부의 에스테가문(Maison d'Este) 공작 에르콜레2세(Hercule II d'Este, 1508~1559, 재위1534~1559)의 딸 안 데스테(Anne d'Este ,1531~1607)와 결혼. 안의 어머니 르네 드 프랑스(Renée de France, 1510~1574)는 프랑스 루이12세(Louis XII, 1462~1515, 재위1498~1515)의 딸로서, 프랑스왕가 혈통이였던 셈인데 프랑수아는 이로서 당시 주군으로 섬기던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의 이종사촌누나와 결혼한셈[앙리2세의 어머니 클로드 드 프랑스(Claude de France, 1499~1524)와 안 데스테의 어머니 르네 드 프랑스는 친자매사이].

 

본격적인 군인

프랑수아는 사촌인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와 동갑내기이자 앙리2세의 최측근 군인이자 정치가였었는데, 앙리2세의 아버지 프랑수아1세시절부터 영혼의 맞다이를 치루던 당시 유럽최강패권자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의 포위망을 뚫고 도시들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면서 이후 여러 원정전투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그 공적으로 중장(쓰리스타)으로 진급. 

거기다 잉글랜드군으로부터 칼레(당시 영국이 프랑스영토에서 가지고있던 유일한 영토)를 탈환하는등(1558년) 왕이 이뻐할짓만 골라서 했다.

 

우리 세도정치는 조선보다 250년 빠른디?

1558년 칼레를 탈환하고 난 뒤 프랑수아의 조카[프랑수아의 친누나 마리 드 기즈(Marie de Guise, 1515~1560)의 딸]인 메리 스튜어트(Marie Stuart, 1542~1587, 재위1542~1567)가 도팽(왕태자)이였던 프랑수아2세(François II, 1544~1560, 재위1559~1560)와 결혼하는데, 이듬해 1559년 앙리2세가 마상창시합에서 창파편으로 인한 감염으로 서거하게 되면서 어린 프랑수아2세가 갑작스레 왕이되지만 어린나이로인해 삼촌인 프랑수아 드 기즈에게 섭정통치를 맡긴다(사실상 기즈가문은 세도정치의 핵심가문). 

거기다 프랑수아 드 기즈의 동생이자 추기경인 샤를 드 로렌(Cardinal Charles de Lorraine, 1524~1574)역시 형을 따라 프랑스 정치의 핵심에 앉게된다.

 

앙부아즈 음모

1560년에 일어난 앙부아즈 음모(La conjuration d'Amboise, 1560)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된 기즈가문의 프랑수아와 추기경 샤를이 공표한 에쿠앙 칙령(L'Édit d'Écouen, 1559)에 의거해 위그노에 대한 확고한 불평등 정책을 선언하게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칙령에 반발한 위그노들은 프랑수아와 추기경 샤를을 제거하기위해 프랑스 왕실 혈통친왕이자 위그노세력이였던 두 형제 앙투안 드 부르봉(Antoine de Bourbon, 1518~1562, 앙리4세의 아버지)과 그의동생 루이 드 콩데친왕(Louis de Condé, 1530~1569)에게 접촉을 하지만 두 혈통친왕은 문제를 크게 만들고싶지 않아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게되면서, 위그노들은 스스로 무력으로 기즈들을 제거하기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는데 이후 프랑수아 드 기즈가 자기들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되면서 이들을 찾기위한 수사에 들어가게 된다.

위그노들은 본부를 1560년에 앙부아즈 성으로 이전하고 이때 기즈가의 군대가 조직을 와해하는 과정에서 1500명정도의 위그노가 사망한다. 사망자이외에 붙잡힌 위그노들은 심문후 처형당하는데 그 수는 더 많다. 

아래그림은 앙부아즈의 음모 사건이후 붙잡힌 위그노들을 처형하는 모습을 그린 목판화 작품이다.

이렇게 유혈진압으로 사건은 마무리 된다.

 

이쟈 시작이가? 아니 끝이네..

1562년 프랑수아 드 기즈는 샤를9세(Charles IX, 1550~1574)의 군대를 지휘하며 위그노들을 치러가는데 이 1562년부터 이후 앙리4세(Henri IV, 1553~1610, 재위1589~1610)의 낭트칙령(L'Édit de Nantes, 1598)이 반포될때까지 지속되는 36년간의 위그노전쟁의 서막이였다.

당해 하반기 위그노가 점령한 루앙 공성전(Le siège de Rouen, 1562)에서 수장이던 앙투안 드 부르봉을 사살하는데 성공하며 승리하는등 더욱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1563년 2월에 있던 오를레앙 공성전(Le siège d'Orléans, 1563)에서 프랑수아는 위그노측 장 드 폴트로 드 메레(Jean de Poltrot de Méré, 1537~1562)가 쏜 총으로 인해 중상을 입고 며칠뒤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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