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Valois, 발루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마고 여왕'

Mintaka5 2024. 7. 4. 21:49
반응형

Marguerite de Valois, 1553~1615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53년 프랑스 생제르멩 앙레 성(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에서 아버지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와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1519~1589)사이에서 태어남.

대모인 이모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23~1574)의 이름을 따왔고, 대부로는 페라라 공작 알폰소2세 데스테(Alphonse II d'Este, 1533~1597, 재위1574~1597)를 뒀음.

 

앙리2세의 갑작스런 죽음

1559년 앙리2세가 마상창시합 사고로 서거하지만 당시 6세였던 마르그리트는 뭘 아무것도 몰랐음. 아버지의 사고로 큰오빠 프랑수아2세(François II, 1544~1560, 재위1559~1560)가 왕이 되면서 어린 오빠를대신해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섭정으로서 프랑스를 다스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때, 어린 마고와 오빠 샤를(미래의 샤를9세), 앙리(미래의 앙리3세) 그리고 마고의 미래의 남편이 될 앙리 드 나바라(미래의 앙리4세)가 프랑스 궁정에서 같이 지낸다. 

 

마고로 불리게 된 계기

마고는 루이12세의 딸인 페라라 공작부인 르네 드 프랑스(Renée de France, 1510~1574)의 추천으로 1564~1566년동안 왕이자 오빠 샤를9세(Charles IX, 1550~1574, 재위1560~1574)의 순방에 동행을 하게되는데, 그 순방기간에 연극이 열리는데,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자녀들이 연극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게하고 진행을 시키는데 샤를9세가 마르그리트를 '마고'로 부르는 것이 계기가되어 우리에게도 친숙한 '마고 여왕'이라는 별칭이 이때 생기게 된다.

이때 또 다른 소문이, 오빠들과 근친상간 관계에 대한 소문이 또 퍼지게 되는데, 오빠 앙리(미래의 앙리3세)가 1568년 왕실군대를 지휘하러 떠날 때, 마고를 데리고가는걸 허락을 받고 임무를 띤 출전에 마고는 기뻐했지만 다시 왕궁으로 돌아올때는 오빠에게 아무런 감사함도 표시하지 않은게 그 소문의 원천중 하나라고 함(마고가 1594년 쓴 회고록 출처). 물론 소문이니 소문으로 받아들이자.

 

결혼까지...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1519~1589)는 마고를 스페인 왕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의 아들인 인판테 카를(Charles d'Autriche, 1545~1568)과 결혼시킬려고 했는데 불성사. 그래서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앙1세(Sébastien Ier, 1554~1578, 재위1557~1578)에게도 협상을 벌이지만 무산. 

아버지 앙리2세가 서거하기전에 언급했던 앙리 드 나바라(미래의 앙리4세, Henri de Navarre,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와의 결혼이 표면에 오르는데, 이로서 마고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앙리 드 나바라의 어머니 잔 달브레 여왕(Jeanne d'Albret, 1528~1572, 재위1555~1572)과의 협상이 시작됨. 이후 서로의 입장차이가 좁혀지지는 않지만 어쨌든 결혼을 하게는 된다. 근데 잔 달브레가 파리에 와있을때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게되면서 앙리가 나바라의 왕으로서 (헨리케3세)명목을 유지하게 됨. 

근데 바로 당해 8월 바르톨로뮤 대학살이 앙리와 마고의 결혼식때 벌어짐.. 이 학살로 인해 둘의 결혼식은 붉은 결혼식이라는 별명을 얻고, 일련의 사태들로 어머니 카트린은 결혼을 취소하겠다하지만 마고가 남편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의 제안을 거부한다.

남편 앙리(앙리4세)는 이이후로도 마고를 공범으로 여겨 1575년 파리를 탈출할때도 이야기조차 하지않았는데, 탈출하여 나바라에 복귀해서는 마고를 나바라로 오게끔하려고 노력을 했음. 나름 어느정도 화해가되어 관계가 유지되는데, 오빠이자 왕인 앙리3세(Henri III, 1551~1589, 재위1574~1589)와 어머니 카트린은 나바라의 인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바라로 가는것을 막는데,  이후 역으로 카트린이 앙리(앙리4세)에게 관계회복을 빌미로 딸 마고를 미끼로서 파리로 유인하는 작전을 폄. 물론 안낚임.

 

안풀리네..

이후 오빠 앙리3세가 암살로인해 서거할때까지 계속 중간에서 나바라와 프랑스의 기싸움에 마고가 등이 터지는 형국이 반복, 지속됨. 오빠의 죽음으로 발루아왕조의 대가끊기면서, 헨리케3세가 프랑스의 앙리4세(Henri IV,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가 프랑스왕이 되면서 마고도 왕비가 됨.  안정을위해 자녀계획도 하지만

불임, 혈족문제, 관계의 결함등으로 앙리4세는 교황에게 결혼의 무효를 주장하기에 이른다(1593년).. 물론 마고는 이혼을 거부하고, 협상이 계속해서 합의점도 맞춰지지않은채 기싸움이 벌어지지만, 1599년 교황 클레멘스8세(Clemens PP. VIII, 1536~1605, 재위1592~1605)에 의해 공식적으로 결혼 무효처리가 됨.

 

사망까지

1599년 무효선언이후 앙리4세는 메디치가문출신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s, 1575~1642)와 결혼하게되면서 장남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 재위1610~1643)를 포함한 6명의 자녀를 낳게되는데, 이후 전남편의 암살(1610년)이후 전남편의 자식들의 대모가 되면서 잘 지내다가 1615년 조용히 숨을 거둠.

반응형

'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 > Valois, 발루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수아 드 기즈  (0) 2024.07.18
샤를8세  (1) 2024.07.02
샤를7세  (0) 2024.06.15
카트린 드 메디시스  (0) 2024.06.13
앙리2세  (0) 2024.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