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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1세

Mintaka5 2024. 6. 1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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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 Ier(1494~1547, 재위1515~1547)

프랑수아1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494년(샤를8세 재위11년) 프랑스 Sud-Ouest 꼬냑(cognac)에서 아버지 샤를 당굴렘(Charles d'Angoulême, 1459~1496)과 어머니 루이즈 드 사부아(Louise de Savoie, 1476~1531) 사이에서 1남1녀중 막내로 태어남.

왕과는 거리가 먼 가문

프랑수아는 원래 왕과는 거리가 먼 가문인 앙굴렘 백작가문에서 자랐는데, 태어날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군주 샤를8세(Charles VIII, 1470~1498)가 1498년 쥬드폼(배드민턴과 비슷한 스포츠형태)을 하고 문에 세게 부딫혀 다친이후 서거하게되면서 5촌당숙 루이12세(Louis XII, 1462~1515)가 즉위하게되면서 발루아 직계가 끊기고 방계혈통인 발루아-오를레앙 가문이 지속되게 된다. 

근데 루이12세도 자식없이 1515년 서거하게되면서 프랑수아1세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

 

또다른 방계가문 왕조 시작

위 배경은 루이12세(Louis XII, 1462~1515, 재위1498~1515)가 자식없이 죽고, 프랑수아가 루이12세 살아있을 당시 왕녀 클로드와 결혼하여 루이12세의 사위자격으로(루이11세-루이12세때 관계도 이러함) 계승하여 즉위하게되면서, 루이12세의 발루아-오를레앙(Valois-Orléans)가문의 대가 끊기고 발루아-앙굴렘(Valois- Angoulême)왕가가 프랑스왕의 명목을 잇게 된다.

여튼 1515년 루이12세가 죽고 즉위한 프랑수아1세는 철학자적인 면이 두드러졌다고 하는데, 이는 친누나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492~1549)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임. 어릴때부터 책을 달고살던 누나의 곁에서 항상 책을 봤고, 성년이 되고도 누나 마르그리트는 일종의 독서토론회, 인문학 학회등을 주최하는 등의 열성적인 활동을 하며 지식을 쌓았다고 하는데, 이 영향이 프랑수아에게 그대로 미친듯 함. 

그리고 당시 새로운 문화양식인 르네상스가 프랑스에도 완전히 스며들게 한 장본인이 프랑수아1세. '르네상스형 군주'

 

후원자 / 재건자

르네상스 군주에 걸맞게,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하게 되는데, 그중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인물 레오나르도 다 빈치등이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절정인시기에 명장들에 의해 그려졌던 여러 작품들을 수집하고 프랑스의 수준을 끌어올린다.

이외에도 문학, 건축등에도 흥미가 깊어 문학자들과의 토론, 도서관을 만드는 등의 노력, 성 건축(ex, 앙부아즈성)에 기존의 성들을 르네상스형으로 리모델링시키는 등 다방면으로 뜯어고친다.

 

상남자들의 시대 합승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통치하는 수반의 정치력과 지능등의 소프트웨어적 기능도 중요했지만 하드웨어적인 신체적특성도 그에못지않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1500년대는 희안하게도 유럽의 각국 군주들이 남성미도 넘치고 그만큼 신체적특성도 어마어마했던 것 같다(소프트웨어도 엄청나고).

물론 작은고추가 많이 맵다고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8)가 유럽을 제패했지만, 프랑수아1세(François Ier,1494~1547, 재위1515~1547), 잉글랜드의 헨리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1509~1547),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대제(Soliman le Magnifique, 1494~1566, 재위1520~1566)등 각 국가별로 이름을 크게 남겼던 군주들이 살았던 시대가 1500년대 초중반이다.

프랑수아 1세도 정확한 키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190cm가 넘는 거구를 가졌다고 하며, 스포츠, 무예등을 즐겨했다고 한다.

 

헨리8세와 한판 붙음(전쟁아님, 레슬링)

프랑수아는 즉위원년(1515년)에 이탈리아를 기습침공하게되는데, 왕권확립에 목적이 있어보인다. 뭐 나름 승리한 전투이지만 이후부터는 프랑수아에게 암울하게 돌아간다. 당대의 최대라이벌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8)가 있었기 때문. 프랑스를 감싸듯이 국가를 통치하던 카를5세로서, 프랑수아에겐 큰 위협이라 바다건너 잉글랜드 헨리8세와 동맹을 맺게된다면 그래도 싸워볼만 하지않을까? 라는 생각에

영혼의 맞다이를 시전하게 되는데, 1520년..

잉글랜드 벨링엄(Bellingham)에서 펼쳐진 레슬링 경기. 제목은 금란의 들판(Le camp du drap d'or)로서 프랑수아1세와 헨리8세의 경기. 경기승패를 떠나서 이곳에서 협상이 이루어질까 기대했지만, 헨리8세가 거부. 

 

카를5세와의 맞다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수아1세의 프랑스군이 완전 대패를 한 파비아 전투(Bataille de Pavie, 1525)에서 전체 23000명의 병력의 65%인 15000명이가 사상자가 되면서(카를5세의 군대도 규모는 거의 똑같으나 사상자 500명..)거기다 프랑수아1세를 포함한 지휘부 대부분이 포로가되거나 전사한다. 

이로인해 포로로 마드리드에 끌려가는데, 갑자기 공석이된 프랑스왕실에서 발칵 뒤집혀서 난리가 난다. 어머니인 태후 루이즈가 오죽 급했으면, 당시 이단으로 간주되던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대제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이건사실 당시로서는 말이안되는 행동이라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지만, 이런정성에도 불구하고 큰 효과는 없었다.

이후 프랑수아1세에게는 불평등한 조약인 마드리드조약에 서명한 이후에야 풀려나게 되는데, 두아들 프랑수아와 앙리(미래의 앙리2세, 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가 볼모로 마드리드에 남게됨(1530년까지). 

저때 포로가 된 치욕때문이였는지, 죽기전까지 이탈리아에대한 미련을 버리지못하고 카를5세에게 덤벼듬.

 

여러모로 선량하고 좋았던 왕

잦은 전쟁으로인한 재정문제와 외교문제는 영 별로였지만, 프랑스를 문화적으로 새로이 재편한 르네상스형 개혁군주로 꼽힌다. 수많은 기존질서를 정비하게 되는데, 이로인해 수많은 예술가들과, 건축가들, 인문학자, 철학자등이 프랑스로 들어와서 문화의 꽃을 피우는 결과를 낳게 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프랑스도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게 된다.

여튼저튼 카를5세만 생각하면 이를갈던 프랑수아1세도 결국 벽을 넘지 못하고

1547년 랑부에 성 Château de Rambouillet에서 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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