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Valois, 발루아

샤를7세

Mintaka5 2024. 6. 1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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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VII ' le Victorieux' (1403~1461, 재위1422~1461)

샤를7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403년 일드프랑스 파리 로뗄 생-뽈 (L'hôtel Saint-Pol)에서 아버지 샤를6세(Charles VI, 1368~1422, 재위1380~1422)와 이자보 드 바이에른(Isabeau de Bavière, 1370~1435)사이에서 11번째로 태어남(전체12명. 7남 5녀, 7남중 6남).

 

왕이랑은 완전 먼~~~ 11번째

위에도 언급했듯이, 샤를7세는 12명중 11번째로 태어나서 왕위랑은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고 봄(첫째 형 샤를 드 프랑스가 1386년생으로 샤를7세와 상당한 나이차이). 뭐 샤를 드 프랑스(1386)가 태어난지 몇달만에 사망하고, 다섯째 샤를 드 프랑스(Charles de France, 1392~1401)도 9살로 요절하지만 샤를7세가 태어날때 루이 드 기옌(Louis de Guyenne, 1397~1415) , 장 드 프랑스(Jean de France, 1398~1417) 두 형이 있었지만, 둘다 요절을 해 버려서 모든 형들이 다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운도 좋네.. 라고 하지만 당시는 백년전쟁).

 

어릴때부터 혼란 속

당시, 백년전쟁이 잠시 소강상태긴 했는데,  프랑스왕실과 부르고뉴, 잉글랜드등 음모는 서로 왔다갔다하면서 냉랭했는데,특히 부르고뉴 공작 장 드 부르고뉴(Jean de Bourgogne, 1371~1419)와 사실상 샤를6세(Charles VI, 1368~1422, 재위1380~1422)의 정신병으로 사실상 실권을 잡고있던 샤를6세의 아우 루이 도를레앙(Louis d'Orléans, 1372~1407)과의 대립이 극에 달할 때 였는데,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샤를7세가 4살때인 1407년에 루이 도를레앙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내전이 발생하게 됨.

 

내전+백년전쟁 재발

그렇게 치고받고 내전이 일어나 본토에서도 난리가 나는데, 이 때를 틈타 잉글랜드의 헨리5세(Henry V, 1386~1422, 재위1413~1422)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침공을 하는데, 수많은 병력이 규합하여 양국이 각각 2만이넘는 병력으로 대전투를 벌이는데, 이 전투가 백년전쟁(Guerre de Cent Ans, 1337~1453)의 3대전투중 하나인 아쟁쿠르 전투(bataille d'Azincourt, 1415)가 벌어진다.

이 대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궤멸적인 패배를 하게되며 앞선 샤를 도를레앙(Charles d'Orléans, 1394~1465)등 고위귀족이 잉글랜드에 포로로 끌려가게되며, 프랑스는 큰 절망에 빠지게 됨. 이 전투이후로도 아르마냑파(부르고뉴 대항세력)에 의해 장 드 부르고뉴(Jean de Bourgogne, 1371~1419)가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잉글랜드-프랑스 간 조약인 트루아조약( Ltraité de Troyes, 1420, 잉글랜드 헨리5세가 프랑스 샤를6세 서거 후 프랑스왕으로 즉위한다 라는 조건)이 체결된다.

 

1422년, 즉위

이 해에는 변수가 여럿 발생하게되는데, 이 복잡한 시국에서 잉글랜드 헨리5세(Henry V, 1386~1422, 재위1413~1422)와 샤를7세의 아버지 샤를6세(Charles VI, 1368~1422, 재위1380~1422) 둘다 2달차이로 사망하게 되면서 권력이 다음승계자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때 샤를7세( Charles VII, 1403~1461, 재위1422~1461)가 샤를6세의 후임자가 되어야하지만 트루아 조약으로, 헨리6세(Henri VI, 1421~1471, 잉글랜드재위1422~1461, 1470~1471, 프랑스재위1422~1453)가 갓난아기로서 헨리5세의 다음을 잇게 되는데, 샤를7세는 프랑스왕위를 이어야하는 트루아 조약을 무효로 만들기위해 다시 수많은 전투를 벌이게 된다.

크라방 전투(Bataille de Cravant, 1423), 브로시니에르 전투(Bataille de la Brossinière, 1423) 베르뇌유 전투(Bataille de Verneuil, 1424), 몽타르지 공방전(Siège de Montargis,1427)등 수많은 전투를 재위이후 치르게 됨. 

 

오를레앙 공방전과 잔다르크

1428년에 벌어진 오를레앙 공방전(Bataille d'Orléans)에서 잉글랜드구노가1년넘게 대치를 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샤를7세가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듣게 되는데, " 한 처녀가 오를레앙에 곧 나타날 것이며 프랑스가 그녀에게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이후 잔다르크가 샤를에게 오게되는데, 암살이 배후에 있을지 모르는 의심에 변장을 했는데 잔다르크가 바로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 독대를 하며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 호기심이 두달 뒤 오를레앙 공방전 승리라는 결과로 다가오게 된다.

 

랭스 탈환

이곳이 왜 제목에까지 나오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왜냐하면 랭스는 역대 모든 프랑스 군주들이 즉위식을 거행했던 곳이기 때문. 당시까지만해도 부르고뉴 영역이였던 랭스를 신의 부름을 받은 잔다르크와 측근들의 공세로 탈환을 하여 드디어 1429년 7월에 샤를7세로서 즉위식을 거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전투를 기점으로 잔다르크도 샤를7세의 눈밖에 슬슬 나버리면서, 이후 전투에서 붙잡혀 화형을 당하는 등 우리가 책에서 봤던 내용들이 여기까지다. 잔다르크가 화형을 당하기까지의 과정은 현재도 연구가 진행중에 있다고 하니, 섣불리 글로서 표현하진 않겠다.

 

승리 그후 더큰 시련

여러차례의 공세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1453년 드디어 116년간의 긴 백년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짓고 비로소 프랑스의 정통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자식만큼은 잘 따라주지 않아 말년이 고달팠는데, 장남 루이11세(Louis XI, 1423~1483, 재위1461~1483)이 1440년(프라게리 반란, La Praguerie, 1440) 에 첫 반란을 일으키고, 이후에도 계속 틈만나면 위협을 해대는데, 전쟁중에 아들의 도발까지 아주그냥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지경이였을 것이다.

거기다가 1456년, 루이가 반란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가 접수되자마자 잡으러 가는데 루이11세는 바로 적국인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Philippe III de Bourgogne, 1396~1467)에게 도망치는데, 결국 아들을 잡지못하고 돌아가지만 이게 이들 부자의 마지막 마주침이였고, 샤를이 죽을때까지 서로 안보게 됨.

전쟁동안 받은 스트레스와, 병증등이 합병증을 일으키며 1458년부터 사실상 몸이 망가지게되는데 1461년 서거할때까지 고생하다가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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