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동서분당

Mintaka5 2024. 11. 4. 15:40
반응형

동서분당(1575)

1575년(선조8년)에 사림파가 동, 서로 분열된 사건을 뜻함. 

 

배경

I. 훈구파

사림파와 쌍벽을 이루던 윤원형을 필두로 한 훈구파는 1545년(명종원년)에 을사사화를 통해 사림파였던 윤임(1487~1545)을 필두로 한 대윤을 숙청하고 훈구파인 소윤 윤원형은 정권을 장악하지만(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윤원형의누나이고, 어린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함), 1565년 문정왕후가 서거하면서 윤원형을 필두로 한 훈구는 일시에 몰락한다. 그리고 1567년에 즉위한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대부터는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사실상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얼마남지 않았던 훈구파는 자연스럽게 사림파로 흡수된다. 

II. 분열의 시작

그러나 일당체제가 된지 얼마안되어 각자의 색깔에 따른 내부분열이 조금씩 일어나면서 붕당의 조짐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붕당을 형성하는 것은 성종(1457~1494, 재위1469~1494)대에 완성된 경국대전(1485)을 근거로 하면, 신료가 붕당을 형성하는 것은 범죄행위였기에 명백히 금지였지만 송나라 유학자 구양수(1007~1072)와 남송 유학자 주희(1130~1200)등이 '군자당이 소인을 배제하고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라는 논리가 제시되면서 이 논리를 사림파가 받아들이게 되면서 붕당의 역사가 시작된다.

선조는 명백히 붕당형성을 범죄행위로 보았지만, 왕권강화책으로 발전적인 수단으로 삼는 한에서 붕당을 허용하기에 이른다.

 

동서분당 사건 발생 원인

I. 이조전랑

1575년 사림파가 이조정랑 자리를 둘러싼 대립으로 인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된다. 이조전랑은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중 으뜸인 이조소속에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을 합쳐서 전랑이라고 불렸는데 상대적으로 낮은 중간급의 품계에 속하는 직위였지만, 각 부서별 관리천거, 인사추천권한, 삼사관리 추천권한등을 가진 요직중 요직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핵심 보직이였다.

이런 막강한 권한은 이조의 수장 정2품 이조판서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독립된 권한이였기 때문에 누가 이 직책을 맡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결정될만큼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였다.  

 

II. 천거과정

1575년 이조정랑에 심충겸(심의겸의 아우, 1545~1594)이 후보로 오르는데, 당시 이조정랑으로서 후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김효원(1532~1590)이 반대하면서 심충겸을 후임으로 못맏기고 이발(1544~1589)을 후임으로 추천한다. 김효원은 1572년 당시 이조정랑 오건(1521~1574)의 후임으로 추천받는데, 이과정에서 상관인 이조참의 심의겸(1535~1587)이 김효원은 장인인 정승계가 윤원형의 첩실 정난정(1506~1565)의 아버지 정윤겸(1463~1536)의 조카였고 수학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잠시 윤원형의 집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반대를 한다. 

이런 주장으로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지 못하고 심의겸계 사람인 조정기(1535~1575)가 임명되기에 이른다. 

여튼 이발을 추천한 이후 대신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하면서 김효원계와 심의겸계로 나뉘어진다. 다음과 같은 표로 정리해둠. 

  김효원계 (동인) 심의겸계 (서인)
I 김효원(1532~1590) 심의겸(1535~1587)
II 허엽(1517~1580) 박순(1523~1589)
III 이산해(1539~1609) 정철(1536~1593)
IV 류성룡(1542~1607) 정엽(1563~1625)
V 우성전(1542~1593) 조헌(1544~1592)
VI 김성일(1538~1593) 이귀(1557~1633)
VII 이원익(1547~1634) 윤두수(1533~1601)
VIII 이덕형(1561~1613) 이산보(1539~1594)

김효원은 수도 한양 동쪽편 건천방(현 중구 인현동)에서 살아서 김효원계는 동인, 심의겸은 한양 서쪽 정동(현 중구 정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심의겸계는 서인이라 불렀다.  

 

계미삼찬

분당이 일어날 당시 정2품 이조판서 율곡 이이(1536~1584)은 당쟁의 균형을 맞추고 화합을위해 선조에게 당사자 둘(김효원, 심의겸)을 지방관으로 파견하는 차원에서 해결을 보자고 건의를 하면서 무마되나 했지만 상대적으로 더 외진 변방으로 배치받은 김효원의 동인측에서 이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면서 연일 상소가 올라가면서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시끄러워진다.

이들은 이이의 공정하지 못한 처사를 지적하면서 이이마저도 서인으로 몰아세운다. 그렇게 비난이 거세지다가 동인계열의3인이 이율곡을 몰아내려하다가 오히려 선조가 이 3명을 유배보내버리면서 이율곡을 보호하는데.. 이로 인해 동인과 서인사이의 골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아래 표는 이율곡을 파직하려던 동인계열 3명. 1583년 계미년에 3인이 이율곡을 파직하려다 도리어 유배보내졌던 일로 계미삼찬이라고도 한다.

  생몰년도 품계, 직위
송응개 1536 ~ 1588 정3품 상계* 대사간
박근원 1525 ~ 1585 정3품 상계* 도승지
허봉 1551 ~ 1588 종3품 성균관 전한

*정3품 상계는 당상관, 정3품 하계는 당하관이다.

반응형

'한국사 사건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갑신정변  (0) 2024.11.05
신임옥사  (0) 2024.11.05
정축하성(삼전도의 굴욕)  (0) 2024.11.04
계축옥사  (0) 2024.11.03
계유정난  (0) 2024.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