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갑신정변

Mintaka5 2024. 11. 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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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1884)

1884년(고종20년)급진개화파가 청나라의 내정 간섭으로부터의 독립(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을 몰아내기)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3일만에 끝난 정변이라 하여 3일천하라 함. 

아래표는 갑신정변의 주도파인 급진개화파 핵심인물들.

  생몰년도 비고
김옥균 1851 ~ 1894 개화파 수장, 청나라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함, 조선에서 부관참시
박영효 1861 ~ 1939 친일파, 갑신정변 실패이후 일본 망
홍영식 1856 ~ 1884 외교관, 우정총국 총판, 갑신정변 실패 후 처형
서광범 1859 ~ 1897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망명갔다 복귀 후 학부대신, 미국에서 병사, 미국식 이름 케네스 서
서재필 1864 ~ 1951 독립신문 발간, 독립협회 설립,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 망명, 1890년 한국인 최초 미국 시민권자, 의사

 

배경

I.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1876년 일본과 조선에게 있어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이 체결되고, 3개의 항구(제물포, 부산, 원산)가 개항됨에따라 위정척사파(바른 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을 물리친다. 흥선대원군의 국론)들의 시위가 격화되었고, 1877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반대하기에 이른다.

이 때부터 조선의 낡은 봉건체제를 개혁해 조선을 근대 사회로 발전시키려는 급진 개화파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온건 개화파가 청과의 사대를 너무 급하게 중단요구를 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는 1880년대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의 총애를 받지만, 총애를 믿고 점점 더 급진적으로 서구식 정책들을 밀어붙이게 되는데..

 

II. 흥선대원군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1821~1898, 섭정집권1864~1874)은 1865년부터 경복궁 중건을 시작하는데, 수많은 공사비용과 공사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밀어붙이고자 백성들에게 강제로 원납전이라는 강제성 기부금을 징수, 4대문 통행세 징수, 당백전(기존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의 화폐)이라는 화폐를 만들어서 공사를 주도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이 당백전이 주조되면서부터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온갖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면서 주조가 중단되기는 하는데, 발행한 만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만다.  경복궁을 중건해 조선 왕조를 재건하고 본인의 입지를 키울려다가 오히려 재정적 몰락을 시작으로 점차 조선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는 변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II. 묄렌도르프

프로이센 귀족출신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1901)는 할레 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면서 일찍이 외교관이 되어 청나라로 이주해 해관(세관)에서 일하게 된다.  이후 1882년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와 고종을 통해 조선 해관 총세무사(종3품 참판급)에 임명되게 된다. 

그러나 청나라에 있을 때 부터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1823~1901)의 최측근세력이던 묄렌도르프는 당시 조선이 개화정책으로 인해 재정난에 시달리고 이싸는 것을 잘 알고있었는데, 당시 친청파 세력은 당오전을 제조해 재정을 확보하고자 주장하고 친일파 세력은 타국에 차관을 얻어 금본위제도(국가중앙은행에 금을 비축해두고, 금의 가치만큼 화폐를 발행해 시장에 유통시키는 제도)로 전환하자고 주장하였다.

고종은 둘다 하고자 하는 결정을 해 김옥균(1851~1894)을 일제로 보내서 차관을 받아오게 하고, 묄렌도르프와 영의정 홍순목(1816~1884)의 건의로 당오전도 주조하기에 이른다. 

 

III. 임오군란

1882년(고종18년) 임오군란이 발생한다. 임오군란은 수도 한양의 하급 군관들과 더불어 빈민계층들이 뭉쳐 1876년에 일어난 조일수호조규로 인한 3포 개항이후 시행된 개화정책과 집권세력에 저항하면서 일으킨 민란이다. 

동아시아는 이미 1840년대부터 서구의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고있었는데, 조선은 1874년까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이미 수십년이나 고립되어 있었고, 1874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다음해 1875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면서 이 사건을 빌미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다. 이 이후 위정척사운동, 개화정책으로 피해를 본 백성들, 물가폭등, 생활고등으로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가 1882년에 터진 것.

이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내정을 간섭하던 청나라와 조일수호조규 체결이후 간섭에 들어간 일본이 대립하게 되는데, 명성왕후 민비(1851~1895)가 청나라를 사대하는 주의의 세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반대로 일제의 메이지 유신을 본 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세력인 개화당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 이후로 위정척사파의 반발과 민비의 척신세력의 부패가 극에 달하게 되면서 개화파는 급진, 온건파로 갈라지게 된다.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온건 개화파 급진 개화파
공통점 위정척사파(흥선대원군 계열)를 축출하자
차이점 개혁을 실시하되, 청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한 뒤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자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청산하는 것이 우선적, 친청파인 명성황후 민씨 정권을 타도하자
롤모델 양무운동(청나라, 1861) 메이지 유신(일제, 1868)

위의 표로 정리한 것 처럼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는 위정척사파를 축출하는데에는 의견이 같았지만, 청나라를 사대하는 민비(명성황후)세력의 처리점이 서로 달랐다. 급진파는 둘다 모두 척결해야한다는 것을 울부짖으면서 온건파와도 갈등이 깊어진다. 

  온건 개화파 급진 개화파
I 김홍집(1842~1896) 김옥균(1851~1894)
II 김윤식(1835~1922) 박영효(1861~1939)
III 박정양(1842~1905) 서재필(1864~1951)
IV 어윤중(1848~1896) 홍영식(1856~1884)
V 신기선(1851~1909) 윤웅렬(1840~1911)
VI 이조연(1843~1884) 유길준(1856~1914)
VII 이시영(1869~1953) 윤치호(1865~1945)
VIII 이상재(1850~1927) 고영희*(1849~1916)
IX 김종한(1844~1932) 서광범(1859~1897)
X 민영익(1860~1914) 서재창(1866~1884)
XI   박영교(1849~1884)

*고영희 : 정미칠적, 경술국적

 

정변의 시작

I. 거사준비

고종이 김옥균을 일제로 보내 차관을 받아오려던 계획이 실패로 끝나면서 급진 개화파의 궁 내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데, 이들은 온건 개화파가 위정척사파나 민비세력과 타협해서 우리들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해 더욱 불신을 하게 된다.

갈때까지 갔다고 생각한 급진 개화파는 무력 정변을 준비하게 되는데, 때마침 청나라가 프랑스3공화국과 안남(베트남)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면서 점차 청나라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조선에 주둔한 청군의 절반을 전선에 보내기위해 철수시키고 있던 것을 기회로 삼아 김옥균등의 급진 개화파 핵심인물들은 미국, 일본등에도 지원을 약속받기위해 직접 가는데, 일본만이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II. 거사(12월4일)

그렇게 거사를 계획하면서 민비 세력, 온건 개화파, 위정척사파등 정권을 타도하고 권력을 빠르게 장악해 자신들의 개혁을 실천하고자 마음먹고, 1884년(고종20년) 홍영식(1856~1884)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총국의 창설, 건물 낙성식 행사후 연회를 이용해 거사를 시행하게 된다. 이때가 1884년 12월 4일인데, 연회가 시작될 무렵에 옆건물에 불을 질러서 혼란을 만들고 이들 병력이 모두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김옥균 일행들은 창덕궁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해 청국군대가 쳐들어왔다고 거짓 보고를 하여 고종을 경우궁으로 피신하고 일제 공사관 공사에게 군대를 보내 보호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김옥균의 계산으로 일본군 병력이 경우궁을 둘러싸며 고종을 호위하고 김옥균 일행들은 온건 개혁파와 위정척사파 대신들을 암살한다. 이들은 계획에 성공해 새 정부를 꾸리기 위해 상대적으로 민비 세력에서 소외되었던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1831~1891)에게 정변의 의도를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하며 새 정부 구성을 제안하게 된다. 

 

III. 다음날(12월5일)

김옥균 일행들은 창덕궁으로 다시돌아와서 인사 발표를 한다. 고종의 친척들을 의정대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판서등에 앉히고 김옥균 일행들도 역시 판서, 참판등 핵심 요직을 급진 개화파로 채우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인사를 통해 급진 개화파는 왕실 종친과 연립한 내각으로 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 백성들은 딱히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외국인들이 조선으로 들어와서 조선인들을 죽이고 잡아먹고 아녀자들을 겁탈하는등의 유언비어들이 이미 전에부터 퍼져있어서 개화파를 반기지는 않았다.

민비 세력은 민비(명성황후)와 비밀리에 서신을 교류하면서 이들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사태를 보고받은 청나라 측에서 군대를 출동하고자 할 때 김옥균의 권유로 경우궁에 머무르고 있던 민비는 고종에게 창덕궁으로 다시 환궁하자고 말하자 고종도 이를 지지하게 된다. 이에 김옥균 일행들은 창덕궁으로 고종내외가 환궁할 시 적은 병력으로 넓은 창덕궁을 방어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만 고종의 명령에 불복할 수 없어서 창덕궁 대신에 계동궁으로 이들 거처를 옮긴다. 

민비는 거처를 옮기고 나서도 계속된 창덕궁 환궁을 요구하지만 김옥균은 단호히 반대하다가 일본군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1842~1917)가 청군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하는 바람에 고종내외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된다.

 

IV. 12월6일

정변 셋쨋날인 12월6일 김옥균은 창덕궁에서 개혁정강14조를 고종에게 올리고 고종이 재가를 하려던 순간 청군1500여명이 창덕궁을 에워싸 이들을 공격하면서 50여명의 병력으로 대항할 수 없어 결국 패배한다. 일본군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자신만만했던 것과는 달리 청군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줄기차게 도망친다.

급진 개화파의 3일천하가 끝이나는 순간이다. 

갑신정변 주역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미국으로 망명하고, 조선 정부에서 이들이 일으킨 정변을 역모사건으로 규정하고 역모죄로 주동자들을 처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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