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축하성(1637)
병자호란(1636~1637)당시 강화 피난길이 막혀 남한산성에서 59일간 농성한 끝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숭덕제, 1592~1643, 후금재위1626~1636, 청재위1636~1643)에게 항복하고 삼전도(현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항복의 예(삼배구고두례)를 행한 것을 말하며, '정축하성'이라 표현한 것은 절대 항복하지 않고 성에서 스스로 나온다는 뜻인 하성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배경과 경과
I. 조선 사신
1627년 정묘호란이후 조선과 후금은 형제국가가 되는데, 계속된 무리한 요구로 인해 후금에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난다. 이후 1636년,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황제 홍타이지는 재위에 오름을 선포하면서 열린 행사에 조선 사신들이 삼배구고두례(세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라)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진다.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고 있던 국가였기에 사실상 오랑캐나 다름없던 청나라에 삼배구고두례를 행할 수 없다라는게 그들의 생각이였다.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들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 주화론(청나라와 화친을)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청으로 압송하라 하지않으면 공략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하게되는데 조선에서는 이를 무시해버린다. 원래도 명나라 후방에 있던 조선이 거슬렸었다고 생각했던 홍타이지였는데, 사신의 태도에 격분한 홍타이지가 이들을 내쫓고 몸소 공략에 나서겠다고 하면서 사실상 조선침공을 준비하게 된다.
II.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1636년 12월,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놓고난 다음날 바로 조선에 침입하게 되는데, 떠난지 10일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다다른다. 이들이 이렇게 빨리 진격해올 것이라고 예상치 못한 조선조정에서 난리가 나는데, 순식간에 흉흉한 소문이 돌면서 성을 빠져나가는 자들이 수도없이 많았고, 당시 조선의 16대 임금이였던 인조(1595~1649, 재위1623~1649)는 소현세자(1612~1645), 2남 봉림대군(미래의 효종, 1619~1659, 재위1649~1659), 3남 인평대군(1622~1658)등을 강화도로 먼저 피신케끔 하고 인조 자신도 아들들이 떠난 날 밤에 강화도로 향하는데 이미 청군들이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아버림으로서 임시방편으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한산성에 들어와서도 이곳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는 타이밍을 잡고 있었는데, 12월의 혹한의 추위와 건강악화, 말이 다니기 힘들정도로 내린 눈 등으로 도저히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강홛도로 갈 수 없었기에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온다.
III. 절망
그러나 남한산성에 들어온지 40여일이 지난 시점때까지 소소한 전투에서는 몇번 이겼지만, 식량이 떨어지고 청군의 지속적인 남한산성 포위로 인해 말들이 먹이가 떨어지면서 말들이 죽으면안되니 백성들의 집 지붕에 있는 짚을 말먹이로 먹이는 노력까지 하지만 말들이 죽으면서 모자란 식량을 말고기로 채우는 등 어떻게든 버티려고 하지만 산성 외부의 조선군대가 청군에 모두 패배하면서 인조를 구원하지 못하니 점점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절망적으로 바뀐다. 이 때 당시는 명나라도 국운이 다해갔던 터에 조선에 지원을 할 처지가 못되었었고, 남한산성 내 대신들도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의 주화파(청나라와 화친을)와 예조판서 김상헌(1570~1652)의 주전파(청나라를 배척하자)로 나뉘면서 대립하다가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강화를 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면서, 1637년 1월초 최명길에게 하여금 인조의 국서를 들고 홍타이지에게 전달하는데, 홍타이지는 답서로 인조에게 산성에서 나와 인조와 주화파 주모자3명을 본인의 군문에 와서 항복을 행하라는 내용을 보낸다. 이에 고민을 하던 조정에서 왕실가족이 피난가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오게되면서 조선의 대 청 항전의지가 완전히 꺾이게 되면서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게 된다.
삼전도의 굴욕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면서 인정은 하고싶지 않아서, 스스로 성에서 나온다는 뜻에서 하성이라는 용어를 쓰라고 지시한다. 청군의 군문에 당도한 인조와 대신들은 처음에는 항복의식으로 반합(조선의 국왕은 두손을 묶은 다음 구슬을 입에 물고 텅 빈 관을 짊어지고 항복의식을 행하라)을 요구받았는데 너무 굴욕적이고 비참한 요구라 어찌저찌 타협을 해서 삼배구고두례로 의식을 행하기로 하게 된다. 인조가 홍타이지 앞에서 무릎을 3번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면서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행하게 된다. 이로서 조선은 청나라에 공식적으로 항복하게 된다.
이후
이로서 조선과 청나라간 강화가 체결된 이후 소현세자(1612~1645), 2남 봉림대군(미래의 효종, 1619~1659), 김상헌(1570~1652)등이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어지게 되고, 병자호란이 끝난지 2년이 지난 1639년에 삼전도에 삼전도비가 세워지게 된다(홍타이지가 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