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경신환국(1680)

Mintaka5 2024. 10. 28.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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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1661~1720, 재위1674~1720)이 일으킨 환국(급격하게 정국이 바뀜, 정치적 국면 전환) 3가지(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중 경신환국에 대한 설명.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1641~1674, 재위1659~1674)대부터 두차례의 예송논쟁으로 이미 골이 깊어져버린 서인과 남인의 붕당정치가 숙종대에 들어와서 급격한 정치적 국면 전환에 휩쓸리게 된다. 

 

배경

1680년(숙종6년)에 일어난 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한 일을 뜻함. 숙종의 첫 환국작품으로 아버지 현종이 1차예송(기해예송, 1659, 현종원년)과 2차예송(갑인예송, 1674, 현종15년)을 겪으면서 특히 2차 갑인예송때 남인이 정권을 잡지만,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함에 따라 숙종은 예송정국에 끌려다니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며 13세의 나이에 바로 친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숙종의 외조부이자 서인이였던 청풍부원군 김우명(명성왕후의 아버지, 1619~1675)이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녀와 간음해 자식을 낳았다고 무고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이는 인평대군(효종의 동생, 1623~1658)의 아들들이자 3복이라고 불리는 당시 왕실종친 실세 3명 복창군(1642~1680), 복선군(1647~1680), 복평군(1648~1700)이 남인정권에 영향을 지대하게 미치는 존재들이라, 이를 경계한 김우명과 명성왕후(숙종의 모친, 1642~1684)는 특히 경신대기근(1670~1671)당시 청나라 강희제(1654~1722, 재위1661~1722)에게 가서 구휼을 받아왔던 복선군을 특히 경계했는데, 결국 이3형제를 모두 죽이기로 마음먹고 이들을 궁녀와 간음을 했다고 숙종에게 주장한 것. 이 사건이 홍수의 변(1675년, 숙종1년)이다[홍수:붉은 옷소매(젊은 나인)]. 언급한 일들이 1680년 경신환국의 원인이 된다.

 

1680년

명성왕후의 형제이던 서인 김석주(1634~1684)가 영의정 남인(탁남, 서인에 우호적) 허적(1610~1680)이 서로 북벌론(여진족 토벌론)에 같은 의사를 표시하면서 김석주가 도체찰사부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점점 환국의 임계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앞서, 숙종은 3형제를 심문하지만 혐의점이 없어 무고로 결판나려는 찰나, 남인의 거목 윤휴(1617~1680)와 허목(1596~1682)이 김우명을 처단하라고 시위를, 명성왕후까지 개입해서 울면서 자살을 빌미로 협박 하면서(김우명을 처벌하던지 3복형제를 처벌하든지 하소서 주상!) 점점 남인과 서인간의 갈등이 생기면서 대비인 명성왕후까지 끼인 진흙탕에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 허적(1610~1680)이 할아버지인 허잠(1540~1607)의 시호(숙종이 내림)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궁의 허락을 받지않고 천막인 유악(왕실이 사용하는 천막)을 빌린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 숙종의 분노를 일깨워버린다.

마침 시호를 내린 당일 비가와서 숙종이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려고했는데, 이미 가져가버린 것에 크게 분노하게 되면서 즉시 서인중심의 요직변경과 군권을 넘기는 조치를 단행한다. 이때부터 남인은 정계에서 밀려나고 심지어 정원로(?~1680)가 불난집에 기름을 붓는데.. 

 

삼복의 옥

정원로가 고변한 내용은 허적의 서자 허견(1646~1680)이 인평대군의 아들 3명(복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이것이 1680년 4월에 터진 '삼복의 옥'이다. 이에관련된 인물들 모두 잡혀 귀양을 가거나 처형당하는데, 영의정이였던 허적은 무관했다는 상소가 올라오지만 서인들의 목표물이 되어버림에 따라 이후 조사에서 혐의가 발겨뇌어 사사(1680년 5월).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니.. 서인들의 다음목표는 윤휴, 허목(허적과 같은 남인이니께..)이였는데 탄핵당하고, 유배후 위리안치, 이후 사사(허목은 사형은 모면하고 추방당하고 고령으로 사망). 남인은 이렇게 몰락하지만 환국은 계속되는데..

이 환국으로 최대의 수혜자가 된 김석주(북벌론으로 협치했던 허적 배신)는 우의정에 책록되면서 같은 서인 김익훈(1619~1689)과함께 남인의 씨를 아주 말려버릴 셈으로 온갖 음모를 계획하고 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석주는 1684년 병으로 사망, 김익훈은 1689년 기사환국때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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