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맹성(Kim maengseong, 1437~1487)
출생
1437년 조선 경상도 성주(현 경북 성주 가천면)에서 아버지 김준례와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조선 초기 사림파의 대표격인 인물로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서 1452년부터 수학했으며 1476년 늦은나이인 39세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초년
1452년 15세가 되던 무렵에 6살많은 스승인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처음엔 개령 감문산(현 경북 김천시 개령면 감문산)에 들어가서 수학하고 이후엔 직지사(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에 들어가 수학한다. 스승 김종직의 마음에 쏙 들던 제자로서 그 총명함이 스승을 감복시켰다 한다. 후일 스승 김종직의 둘째아들이 본인의 딸과 혼인하면서 사돈관계가 된다. 김맹성은 시 읊기, 독서등을 좋아했던 학자였고 종4품 군수였던 아버지 덕분에 본인역시 모자람없이 자랄 수 있었던 환경에서 초년을 보낸다.
급제
조선시대 치곤 늦은나이인 39세인 1476년(성종7년)에 열린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사간원 정언(정6품)으로 첫 관직을 이어나가게 되며 이후 홍문관 수찬, 이조정랑등 청요직도 맡게 된다.
김굉필
본인보다 17살어린 김굉필(1454~1504)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는데, 김굉필은 처외가가 성주 가천에 있어서 이곳에 와서 김맹성을 처음 만나게 되는데 이때가 1472년으로 이때부터 둘은 사제지간이 된다. 김굉필역시 성주 가천에서 지동이라부르는 작은 바위 아래에다가 조그만한 서재를 짓는데 이것이 한훤당이고 김굉필의 호가 된다.
유배
그러나 1478년(성종9년)에 도승지(정3품)이자 종친이였던 임사홍(1445~1506)이 탄핵을 받으면서 도총관(정2품)이였던 유자광(1439~1512)과 파당을 만들고 명나라 사은사로서 명국에 다녀왔던 현석규(1430~1480)를 탄핵한 죄로 의주로 유배를 가게되는데, 김맹성역시 이 탄핵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경상도 고령에 유배를 갔다가 4년만인 1482년에 풀려나 다시 관직에 복귀한다. 1482년에 복귀 후 이조정랑(정5품)직을 수행하면서 홍문관 수찬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향리에 정사(사찰을 가리키는 단어)를 지어 후진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그 학식이 뛰어남에 있어서 김맹성에게 배우고자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스승인 김종직의 가르침인 실천궁행(실제로 몸소 이행하라)을 강조하고 본인역시 그에 맞는 행동을 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지지당
김맹성은 자신의 이상을 자신의 호였던 지지당이 고향인 경상도 성주 가천의 거처명이기도 했다. 지지당에서 지지는 하늘을 보면 욕심을 그친다는 앙지와 멈춤을 알아야 뜻을 정할 수 있다는 다짐을 지지당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이 지지당으로 시, 구절등을 지었고 후진양성에 전력을 다해 이 지지당에 많은 문하생이 몰려들면서 그 명성이 높아진다. 김맹성의 문집으로는 지지당시집(止止堂詩集)이 있다.
사망
1487년(성종18년) 50세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