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김굉필

Mintaka5 2024. 10. 2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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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Kim Koeng-pil, 1454~1504)

 

 

출생

1454년 조선 한성부 정동에서 아버지 김유(?~1487)와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조선 전기의 유학자로서 한훤당이라는 호로 더 잘알려진 인물. 1474년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인연이 된다. 소학동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었다. 말년에 두번의 거친 사화(무오, 갑자)로 인해 그 운명을 달리하는 인물.

 

초년

할아버지가 조선의 개국공신인 조반(1341~1401)의 사위가 되어 한성부 정동에서 살게 되면서 김굉필이 이곳에서 태어나게 된다. 보통의 시기보다 늦은 수학시기(20세)를 가지는데, 20세인 1474년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 수학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문하에 여러 문인들과 토론을 하는 등 수학에 매진하게 된다. 소학을 중시했던 소학동자는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이시기부터 비롯된 것으로 확실한 본인의 철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과거, 관직

1474년부터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480년(성종11년)에 식년과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서 수학을 하게되는데, 1480~1494년 사이에는 기록이 크게 없고 유학자이자 선비로서 당시 군주인 성종(1457~1494, 재위1469~1494)에게 척불(불교를 배척)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상소를 올려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던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관직은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40세(1494년)에 훈구파 출신인 이극균(종2품 경상도 관찰사, 1437~1504)에 의해 유일(遺逸, 초야에 묻힌 재능있는 선비를 천거해 관리로 임명하는 제도)로 천거되어 관리가 되는데 이때 당시 직급은 주부(종6품)였고, 이후 사헌부감찰(정6), 형조좌랑(정6품)등을 지낸다.

 

무오사화

김굉필은 관직생활을 이어나가던중 사화에 휩쓸리게 되는데, 첫 사화는 연산군(1476~1506, 재위1494~1506)이 1498년에 일으킨 사화로 무오사화로 잘 알려져있는 사건이다. 이극돈(1435~1503)이 1498년 당시 실록청 당상관을 역임하면서 [성종실록]을 편찬하고 있을 때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일손(1464~1498)의 스승이였던 김종직(1431~1492)의 [조의제문, 1457]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세조와 훈구파공신들을 비방했다!) 을 기록한 것을 발견하고 만다. 

이극돈은 이를 가만안두었고, 개인적으로 김종직에게 원한이 있던 유자광(1439~1512)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본을 구해 자료를 제출하고 해석과주석까지 달아 연산군에게 전달하면서 연산군이 크게 진노해 주인을 배신한 김종직과 사림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고야 만다. 그리하여 김종직은 이미 1492년 이미 사망해서 다시 처형할 수 없어서 묘에서 시신을 다시 꺼내 부관참시당하고 김종직문하의 제자들이 모두 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한다. 

사실상 김종직이 수괴라는 뜻.. 그렇게 문하생 일부는 참형으로 목숨을 잃고만다. 과거에 김종직에게 조금이라도 배운적이 있거나 자문을 받은 제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형에 떨어졌다. 김굉필은 곤장80대를 맞고 유배형이 내려져 평안도 희천으로 배소받게 된다.  

  생몰년도 비고
김종직(사림의 영수) 1431~1492 부관참시
권오복 1467~1498 처형
권경유 ?~1498
김일손 1464~1498
김전 1458~1523 파직후 1501년 다시 등용
남곤 1471~1527  
남효온 1454~1492  
손중돈 1463~1529  
정여창 1450~1504 종성으로 유배 

유배지에서 후학들을 키우고 학문진흥에 힘썼는데 이때 유배지 희천에서 평안도 지방관이였던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1482~1520)를 만나 학문을 가르친다. 그 외에도 이심원(1454~1504), 이장곤(1474~?), 김안국(1478~1543), 이연경(1484~1548)등을 가르쳤다. 

 

갑자사화, 처형

1504년 또 한번의 사화가 터진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1455~1482)에 대한 보복과 이 기회에 왕권을 강화시킬 명목으로 일으킨사화다. 처음에는 어머니 폐비 윤씨 폐출에 연관되어있는 사람들만 처형되었지만 시간이 가면갈수록 사건이 확대되면서 말한마디 잘못한 신하들도 처형당해버린다.   

김굉필역시 이때 처형당한다. 그역시도 폐비 윤씨 폐출때 찬성을 했기 때문. 

다음표는 폐비 윤씨를 폐출할때 찬성했던 대신들이고 이들모두 이 때 처형당한다.

  생몰년도 직급
윤필상 1427~1504 영의정
이극균 1437~1504 좌의정
김굉필 1454~1504 형조좌랑
이세좌 1445~1504 예조판서, 지경연
성준 1436~1504 영의정
권주 1457~1504 도승지, 충청도관찰사 
이주 1468~1504 사간원 정언 

 

아래 표는 갑자사화 이전에 사망하여 부관참시를 당한 인물들.

  생몰년도 비고
남효온 1454~1492 생육신
한명회 1415~1487 영의정
정창손 1402~1487 영의정 
정여창 1450~1504 현감
한치형 1434~1502 우의정
어세겸 1430~1500 좌의정
심회 1418~1493 영의정
이파 1434~1486 좌찬성

 

도동서원

김굉필 사후 64년이 지난 1568년(선조1년)에 대구 현풍에 사림파들에 의해 건립된 쌍계서원(雙溪書院)이 사액(군주가 현판을 내려준)을 바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서원이 세워진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소실되지만, 1607년(선조40년)에 다시 재사액 받고 1610년(광해군2년)에 '도동'(도가 동쪽에서 왔다)으로 재사액된 현판을 걸고 재탄생한 것이 도동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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