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퇴계 이황

Mintaka5 2024. 10. 1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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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Lee Hwang, 1502~1571)

 

 

출생

1502년 조선 경상도 예안현(현 경북 안동시)에서 아버지 진사 이식(1463~1502)과 어머니 춘천 박씨사이에서 6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남.

 

배경

1천원 지폐 주인공. 조선의 대표 유학자로서 우리에게는 퇴계 이황으로 익숙한 인물로 남인계열 동인의 정신적 지주격 인물.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서 그 수준을 한단계 더 격상시킨 학자로 평가받는 인물.  

이황이 태어나고 자라던 어린시절 1500년대 초는 두번의 큰 사화(1498년 무오, 1504년 갑자)로 인해 정세가 어지러웠고 이에 민심을 제대로 잃은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인해 폐위되고 중종이 옹립되지만 반쪽짜리 권력에 불과해 중종역시 정계에 이끌려다닐 수 밖에 없던 입장이였다. 그리하여 조광조를 필두로한 사림계열 인물들을 기용해 쓰고자 했지만그마저도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사림세력이 몰락하고 훈구가 집권하는데.. 

 

막내의 초년

아이러니하게도 이황의 집안은 무신의 집안이였다. 고조부는 세종대왕(1397~1450, 재위1418~1450)대 군기시부정을 지내면서 대대로 무인이 배출되었다.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대에 들어서 현재 경북 안동인 예안현으로 오게되면서 이황이 이곳에서 태어나게 된 것. 이계양은 유일한 무신가문 내 문신으로서 진사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지만 과거합격에 뜻을 더이상 두지않고 고향에 은거해서 자손을 가르치는것을 낙으로 살았던 것을 후에 이황이 영향을 물려받게되어 후학들을 양성하게 된다.    

이황이 태어나고 6개월만에 부친 이식(1463~1502)이 사망함으로서 모친 춘천 박씨가 6남1녀를 모두 홀로 길러야하는 처지가 되는데 어떻게든 자녀들 교육만큼에는 확실하게 시키고자 하는 의지로 기본 예절, 문장교육등을 시켰다. 이황은 글귀와 논어를 차차 배우면서 성리학에 점차 뜻을 두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과거, 급제

23세(1523년)에 성균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파게되면서 다음해 1524년부터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 이후에 1527년 향시(경상도)에 응시하면서 2등으로 합격, 다음해 1528년에 진사시에 2등을 하고 다시 1533년 성균관에 들어가 1534년 30대가 넘어서 문과 초시 2등으로 급제하게 된다.  

관직에 나가게된 이후에는 홍문관수찬이 되고 사가독서(군주의 명으로 직무를 쉬면서 학문을 닦던 제도, 현재의 연구년과 비슷)까지 하게 된다. 1544년 당해엔 중종(1488~1544, 재위1506~1544)이 승하하고 인종(1515~1545, 재위1544~1545)역시 1년만에 승하하면서 어린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이 즉위하면서 외척세력(대윤, 소윤)이 권력을두고 다투기 시작하면서 시끌시끌해지는데,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이황역시 을사사화 주도세력 이기()의 모략으로 삭탈관직된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황은 시끄러운 관직에서 벗어나 지방에서 인재를 육성해 기른 인재들을 중앙으로 보내 질서를 바꾸고자하는 계획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후 중앙정계에 미련이 사라진 이황은 수십차례 사직상소도 올리고하지만 뜻이 관철되지는 못하면서 외직(지방발령)을 요청해 단양군수(1548)에 부임하고 정성스럽게 고을을 다스린다. 

 

이제 슬슬 뜻을 펼치보자

형인 이해(1496~1550)이 충청도 관찰사(종2품)로 발령받게 되면서 단양에서 근무할 수 없어서(상피제:가까운 친인척끼리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지 못한다)에서 풍기(경상도)로 옮기게 된다. 1550년 이곳 풍기에서 명종에게 건의해서 명종이 친필로 소수서원 사액(소수: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아라, 사액:서원의 이름을 지은 편액을 하사하는 것)을 내리게 되면서 주간에는 관리로 활동하고, 야간에는 문하생에게 성리학을 교육시킨다. 

이런 과정을 계속 하면서 성균관 대사성(정3품), 부제학(정3품), 공조참판(종2품)에 임명되지만 모두 사양하고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갔다. 이후로도 계속된 관직임명이 있었지만 모두 사양하게 된다. 

 

이제 여기서 뼈를 묻는다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연구, 후진양성등에 몰두하게 되면서 수많은 서적을 저술하는데 소문을 들은 문하생들역시 계속해서 끊임없이 찾아오면서 그 후학도가 불어나게 된다. 명종은 이황의 능력을 아까워해 계속해서 구애를 하지만 역시사양.. 이후로는 질병으로 인해 사양하는 좋은 핑계거리까지 생기게 된다. 명종 승하후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대에 와서도 계속된 요청에 마지못해 가는정도였다고.. 

이황은 직접 가르치는 후학들과 토론하는것을 매우 즐겼다고 한다.   

대표적인 이황의 제자로는 다음과 같다.  

  생몰년도 당색 최종 직급
류성룡 1542~1607 동인(남인) 영의정
김성일 1538~1593 동인(남인) 경상우도관찰사
정구 1543~1620 동인(남인) 대사헌
김효원(동인의 영수) 1542~1590 사림파 - 동인 영흥부
이산해 1539~1609 동인(북인) 영의정
심의겸(서인의 영수) 1535~1587 훈구파 - 서인 병조판
윤두수 1533~1601 서인 영의
윤근수 1537~1616 서인 좌찬성
허엽 1517~1580 동인 동부승지

 

사망

1571년 고향에서 주변을 정리하고 조용히 사망. 7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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