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조광조

Mintaka5 2024. 10. 1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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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 조광조(Jo Gwang-jo, 1482~1520)

조광조,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482년 조선 한성부에서 아버지 조원강과 어머니 여흥 민씨 사이에서 3남중 둘째로 태어남.

 

배경

사림의 중시조로서 시대를 많~이 앞서간 개혁가. 성리학을 바탕한 이상적 도덕정치 구현이라는 어마어마한 슬로건을 내달았던 인로서 짧은시간동안 빛이 바라다가 보수적인 시대를 잘못 타고나 현실의 벽을 제대로 느끼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스승 김굉필

아버지 조원강으로부터 어린시절 훈육을 받으면서 자란다. 어느 조선시대 고위급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학문의 뜻을 가지고 성장. 1498년 무오사화(사림인 김종직일파의 실록사초문제로 인한 숙청사)로 인해 희천(현 북한 자강도 희천시)에서 유배중이던 김굉필(한훤당, 1454~1504)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어린 조광조의 영특함을 알아본 김굉필이 조광조를 가르치게 되면서 사제지간이 된다. 이때가 조광조의 나이 16세. 

당시 사림의 영수격 인물인 김종직(1431~1492)과는 만난적도, 교류한 적도 전혀 없었지만 김굉필의 영향을 받아 사림(전원의 산림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의 한 사람이 된다. 스승 김굉필 문하에서 학문을 배울때 후일 적이 되는 남곤(1471~1527)을 만나게 된다.  이후 스승인 김굉필은 1504년 갑자사화(연산군의 친모 폐비윤씨 사와 관련된 대규모 숙청사건)가 일어나면서 사사되며 최후를 맞는다. 

스승은1504년 이렇게 잃었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죽을때까지 잊지않고 살아가게 된다. 

 

마 이게 스카웃이다

1510년 진사시에서 당당하게 장원하지만, 어머니 여흥 민씨가 1511년 사망하면서 3년상을 치르면서 1514년 정도까지 공백이 있게 된다. 3년상을 끝내고 1515년(중종9년), 같이 학문을 배웠던 남곤등의 추천으로 선무랑(종6품 하계 문관 품계)에 발탁되어 관료생활을 하다가 그해 가을 알성시(군주가 성균관 문묘에 있는 공자의 신위에 술을 올리는 의식을 행하고 난 뒤 치르는 시험)에 응시해 을과 수석으로 급제하면서 성균관전적(정6품)이 된다.  

알성시에 응시했을때 조광조의 답안이 중종(1488~1544, 재위1506~1544)이 조광조를 친히 불러 앞으로의 정세를 어떻게 하면좋겠는지를 논하고 그 능력을 높이 평가해 측근으로 기용하게 된다.  정6품인 성균관전적에 오른지 3개월만에 사간원 정언(현재의 국가기록원 공무원격)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 때 큰것을 하나 터뜨리게 된다.

 

쎄다..

사간원정언으로 옮겨진지 며칠 안되었을 무렵에 조광조는 중종에게 사간원, 사헌부 전원을 모두 파직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게 되는데 이것은 중종의 폐비인 단경왕후(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이였기 때문에 중종반정이후 폐비가 됨)의 자리를 회복시키자는 상소에서부터 시작되어 이 상소로 조정대신들의 노여움을 샀던 박상(), 김정()이 유배되면서 유배된 조정대신들 모두가 본분을상실하였으므로 파직해야한다고 중종한테 주장한 것(물론 박상과 김정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고, 직분을 잃은 대간과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이유가 더 컸음).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한 조광조의논리에 3개월간 대간들의 논쟁이 지속되다가 중종이 결국 조광조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중종은 조광조의 뜻에 따라 대간의 관원들 모두를 교체하기에 이른다.

 

이제 슬 개혁을?

이후 쭉쭉 승진을 하면서 1515년 정6품정도였던 조광조의 품계가 1517년즘엔 정3품에 이르게 된다. 중종또한 조광조를 믿고 기용하고 파격승진시키는데에는, 중종반정으로 반쪽밖에 없던 본인의 권력으로 지지기반이 미약한 상태로서 조광조를 기용함으로서 자신의 지지세력을 키우기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151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대간들과의 논란이 점점 불붙게 된다.

I. 소격서 철폐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소격서를 철폐하자는 조광조의 주장. 성리학 이념이 강력했던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운영되는 조선에서 미신이 왠말이냐라는 것이였는데 이것은 사림이고 훈구고 모두 성리학이념을 받드는 입장이였기 때문에 별말이 없었지만, 이 제사는 천자인 명나라 황제(상국의 황제, 조선 국왕의 상관)가 해야할 일이지 명황제의 신하인 전하(중종)가 할일 이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 TNT에 불이 붙게 되어버린다.. 

이게 말만 들었을때는 조광조가 중종의 군주로서의 권위를 폄하했다고밖에 들 수 없어서 대간들에게 공격받기 딱 좋은 포지션이 되어버린 것. 그러나 중종이전 군주들도 소격서를 철폐하지않고 그대로 두었지만 이들역시 잘못 생각했다는 조광조의 주장에 중종은 고집을 일시적으로 꺾지만..

중종이 소격서 폐지 반대를 주장하는 대간들을 모두 교체하라는 명령에 조광조가 연산군의 행실과 비슷하다는 비판을 중종에게 해버리면서(폭군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해라).. 중종은 거의 가스라이팅 당하듯이 조광조의 말을 따라 1518년 소격서가 일시적으로 폐지된다. 

II. 현량과

이는 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인재를 천거해 군주가 직접 면전에서 선발해서 관리로 임명할 수 있는 국가적 시스템이였는데,  조광조가 이를 시행하고자 하니.. 훈구에서는 반발이 거세진다.  이는 성균관을 거치지 않고 추천을 바로하면서 뽑을 수 있게끔 하는 시스템으로서 당시 시대적으로 봤을 땐 상당히 진보적 형태의 시스템이였다고 볼 수 있지만, 막상 시행되고나서는 조광조의 사림일파만 등용되는 문제가 터져나오게 된다.

첫 현량과로 120명의후보를 중종이 직접 1519년(중종13년)에 시험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끝이...

1519년 가을, 1506년 중종반정이 끝나고 공신책록때 공신의 수가 너무 많다고 의심을 해 2등공신이하 75%를 모두 공신 목록에서 지워버려 깊은 원망을 사게되면서 적이 많이 만들어진다.  개혁시도, 공신 위훈 삭제 이후 남곤과 중종과도 갈등을 일으키면서 1519년 11월 중종의 주도로 기묘사화(1519, 사림의몰락) 가 발생하게 된다. 조광조가 전하(중종)를 대신해 민심이 기울어 백성들이 조광조를 왕으로 옹립하려한다는 소문이 궁에 퍼뜨려진 것에다가, 궁 내부 나무의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된다는 글을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함으로서(주초위왕, 走肖爲王)글자를 새기게 해 이런 음모에 중종까지 가만히 두고볼 수 없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를모두 투옥시키고 유배를 보낸다음 사약을 내려 사사케끔 한다. 

1520년 사사된 이때가 조광조의 나이 3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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