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Yi yi, 1536~1584)
출생
1536년 조선 강원도 강릉부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1501~1561)와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남.
배경
5천원권의 주인공. 서인의 영수로서, 퇴계 이황(1502~1571)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의 대가로 이론뿐만아니라 현실에서도 적극적으로 성리학적 근반의 개혁을 하기위해 노력했던 주인공. 1583년 국방부장관격인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국방력 강화를 위해 [시무6조]를 올리지만 주장하지만 안일했던 대신들과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의 반대로 무산되고 다들 알듯이 9년뒤 임진왜란이 터지게 됨으로서 밀리게 된다.
한때 스님
강릉에서 태어나 6살이 되던 해 경기도 파주 율곡리에 정착하면서 아호인 율곡이 이곳에서부터 비롯된 것. 12세에 진사시에 합격해서 백인걸(조광조문인, 1497~1579)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백인걸 문하에서 공부하던 도중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면서 3년상을 치르고 1553년 3년상을 마치지만 아버지가 1551년 신사임당이 사망하자마자 바로 계모인 권씨(주모 출신)와 재혼하면서 율곡은 어머니를 잊지못해서 속세를 떠나 중 이되기위해 금강산에 있는 절에 들어간다(1553~1554년경)만.. 이대로 중으로 계속 남았다면 우리가 아는 율곡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
천재는 때깔이 다르지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신사임당은 절개가 굳고 높은 덕을 지닌 여인으로서 총명함으로 칭송을 받던 유명인사였던 덕분에 율곡역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신동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이어오던 율곡이지만 병으로 자주 누웠던 어머니 신사임당이 1551년 사망하면서 방황하게 되고, 거기다 주모출신 계모 권씨가 율곡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바람에 더욱이 방황하던터에 스님이 되고자 했던 것.
몇살때 장원?
1548년 진사시 초시에 장원을 따내는 기염을 토해내는데 당시 율곡의 나이 12세에 불과했다. 모두가 다 놀랐지만 금강산(승려)에 들어갔다가 시간이 지남에따라 학문의 깊이가 더 깊어지면서 불교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게 되면서 금강산을 떠나면서 속세로 다시 돌아와 조광조의 문하였던 백인걸(1497~1579)의 문하가 되어 수학하게된다. 이 때 오랜 친구가되는 성혼(1535~1598)을 백인걸의 문하에서 만나게 된다.
이후 1558년엔 당시 성리학의 대가였던 퇴계 이황(1502~1571)을 만나 그곳에서 머물며 여러 문제들을 논하고 토론하면서 이황역시 이이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지만 사상이 달라서 결론을 내기까지는 어려웠지만, 학문적으로는 서로 서신을 교류하면서 그 답을 얻고자 했다.
이이는 총9번의 과거에 장원 급제하는 기염을토하는데 13세(1548)부터 29세(1564)까지 총 16년간에 나온 결과다. 이때부터 별명인 '구도장원공'이 붙게 된다.
관리
1564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에 호조로 들어가 좌랑의 벼슬로 첫 관리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조정은 소윤 윤원형의 외척권력의 부패가 정점에 다달랐을 때였고 이이역시 윤원형의 비행에 상소를 올려 관직에서 몰아내게끔 한다. 1564~1567까지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을 모시고 1567년부터는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를 모시면서 직급을 계속해서 올리게 된다.
직급 | 품계 | |
1564 | 호조좌랑, 예조좌랑 | 정6품 |
1568 | 명나라 사신단 서장관 | |
1569 | 홍문관 부교리 | 종5품 |
1571 | 청주목사 | 정3품 |
1573 | 동부승지 | 정3품 |
1574 | 우부승지 | 정3품 |
황해도 감사 | ||
1575 | 사간원 대사간 | 정3품 |
1581 | 대사헌 | 종2품 |
대사헌 겸 예문관제학 | 둘다 종2 | |
1582 | 이조판서, 형조판서 | 정2품 |
1583 | 병조판서 | 정2품 |
우찬성 | 종1품 |
1570~1571, 1577~1580년에 공백이 보이는데 이땐, 1577년 황해도 해주 야두촌에 들어 은거하면서 학문연구와 저술을 병행하며 후학양성에도 힘을 쓴다. 1580년 선조가 계속해서 부름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
서인
1575년 을해당론으로 김효원을 영수로 하는 동인, 심의겸을 영수로 하는 서인으로 분당이 확실시 되는데 당쟁이 격화됨에 따라 동,서인의 강경론자들을 동시에 탄핵시킴으로서 당쟁을 조절하려고 했지만 동인으로부터 과거에 승려가 되어 불교에 귀의했다는 것으로 공격을 퍼붓는데 당쟁을 조절하려는 입장에서 백인걸문하의 동기생 성혼, 윤두수, 윤근수, 정철, 송익필등과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서인쪽으로 성향이 기울게 되면서 더욱 조절이 어렵게 되게 되었다.
생몰년도 | 당색 | |
성혼 | 1535~1598 | 서인 |
윤두수 | 1533~1601 | |
윤근수 | 1537~1616 | |
정철 | 1536~1594 | |
송익필 | 1534~1599 |
개혁
1392년 조선건국이래 2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기강을 잡아 개국시기의 자세로 돌아가야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변법 경장(變法更張)을 주장하는데 이때가 년이다.
내용 | |
I | 문벌이나 출신보다는 능력있는 사람을 기용하자 |
II | 신분을 가리지 말고 평민을 포함해 폭넓게 인재를 등용, 양성하자 |
III | 중앙에서는 외척의 권력 집중화*를 막고, 지방에서는 수령의 자질을 높여 이서**들에게도 녹봉을 주어 민폐를 막아야 한다. |
IV | 붕당을 막기위해서 사림의 공론을 존중하고 사기를 높여야 한다 |
V | 민생을 괴롭히는 방납(공물을 하급관리나 상인들이 대신해 나라에 바치고 백성들에게 높은 대가를 받아내던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 |
VI | 왕실 사유재산을 억제하고 왕실의 경비를 줄여야 한다 |
VII | 군포에 대한 족징(일가친척까지 벌하는)과 인징(한 마을 전체를 벌하는)을 금지해야 한다 |
VIII | 공노비의 선상(노동시간)을 개선하여 부담을 줄여야 한다 |
IX | 사창제***를 실시해 빈민을 구제해야 한다 |
*소윤 윤원형(1503~1565)의 외척 권력 집중화를 두눈으로 직접 목격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
**이서(아전)들은 녹봉이 없어서 불법적으로 백성들의 돈을 뜯어내는 등 부패가 만연했다
***양반, 지주들이 자체적으로 곡식을 저장해두고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던 제도
국방개혁
I. 시무6조
1583년 병조판서(현 국방부장관 격)에 임명되면서 조선의 국방력 강화를 위해 [시무6조]를 펼친다. 시무의 뜻은 당시 시대에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일들이라는 뜻. 10만양병설의 모태가 되는 것이 이 시무6조이다.
시무6조 | 뜻 | |
I | 임현능(任賢能) | 어진 이를 등용하라 |
II | 양군민(養軍民) |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워라 |
III | 족재용(足財用) | 재용(국가재정)을 넉넉하게 마련하라 |
IV | 고번병(固藩屛) | 국경을 견고하게 지켜라 |
V | 비전마(備戰馬) | 평소 전쟁에 나갈 군마(말)를 충분하게 확보하고 길러라 |
VI | 명교화(明敎化) | 교화를 밝혀라(백성을 가르쳐 좋은 방향으로 나가게 해라) |
이를 선조에게 올려 개혁을 실시할 것을 촉구, 반복해서 요구하지만 선조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II. 서얼 허통론
1583년 조선 함경도 회령지방에서 만주 최북방 여진세력인 야인여진의 니탕개(?~1583)가 쳐들어오는 니탕개의 난(1583)이 일어나면서 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제안으로 전쟁에서 실질적인 공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출신들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 양반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딛히면서 좌절된다. 이때도 역시 과거에 불교에 귀의해 승려생활을 했다는 것을 계속 들먹이며 공격을 퍼붓는다.
신분제를 휘청거리게 하는 위험성을 가진다고 동인들에게, 심지어 같은 당론인 서인에서도 비난을 받게된다. 이 때 유일하게 찬성을 한 두사람이 다른 당색이였던 동인의 류성룡(1542~1607)과 정구(1543~1620)이다.
III. 십만양병설
역사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 시무6조 상소이후 10만양병설을 주장하는데, 이는 왜국을 통일할 사무라이는 통일 이후 그 칼날을 조선과 명나라로 둘 수 있을거란 예상을 해 군대를 키워 도발에 대한 방비를 해야한다라고 주장을 하지만, 양사대간 동인과 서인 거의 대다수가 호응해주지 않고 묻혀버린다.
저술
발간년도 | 내용 | |
동호문답 | 1569 | 자신의 정치관을 서술하여 선조에게 올린 정치 사상서(동양판 군주론?) |
만언봉사 (갑술만언봉사) |
1574 | 성학의 주요 내용을 기록한 서책 |
성학집요 | 1575 | 제왕학 : 군주의 교육을 위한 서책 |
격몽요결 | 1577 | 선비, 학도들의 교육을 위한 서 |
석담일기 | 1581 | 군주에게 진강한 내용을 수록한 저서 |
사망
시무6조, 10만양병설등으로 대간들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던 율곡은 병을 얻어 우찬성에서 물러나 파주 율곡촌으로 와서 요양을 하지만 차도가 없음을 알고 1584년 한성부 자택에서 사망.
율곡이 살아생전 직접 키웠던 후학으로는 다음과 같다.
생몰년도 | 직위 | 비고 | |
김장생 | 1548~1631 | 형조참판 | 송시열(1607~1689)의 스승 |
조헌 | 1544~1592 | 공조좌랑, 의병장 |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의병장이되어 전투중 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