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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Mintaka5 2024. 10. 4.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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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바스티안 바흐(프 : Jean-Sébastien Bach, 독 :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685년 신성로마제국 작센 선제후국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Johann Ambrosius Bach, 1645~1695)와 어머니 마리아 엘리자베타 렘머히르트(Maria Elisabetha Lämmerhirt, 1644~1694)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대위법을 완성시킨 바로크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 대한민국에서는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있다. 바흐이후의 작곡가들은 모두 바흐의 영향력 하에 작곡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정도 이다. 바흐의 아들들 역시 5명의 걸출한 음악가들이 나오게 되면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곡 작품번호는 BWV(Bach-Werk-Verzeichnis)약자가 붙는데, 이는 1950년 독일 음악학자 볼프강 슈미더(Wolfgang Schmieder, 1901~1990)가 붙인 것 이다.

 

바흐 인생은 파트가 나뉩니다

I. 유년 시절(L'enfance, 1685~1703)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집안 바흐가문에서 1685년 태어나 아버지 암브로시우스 바흐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큰아버지 게오르 크리스토프 바흐(Georg Christoph Bach, 1642~1697)한테서 오르간을 배운다. 그러나 막내였던 바흐가 태어날 때 이미 40살이였던 아버지가 1695년 50세로 사망해버리면서 14살위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Johann Christoph Bach, 1671~1721)와 함께살면서 형으로부터 작곡을 배운다. 15세가 되던 1700년에 뤼네부르크(Luneburg)에 고교 장학생으로 들어가서 바흐에게 큰 영향을 끼친 두 스승을 만나게 되며 이곳에서 1703년에 학업을 모두 마친다. 

  생몰년도 비고
게오르크뵘 Georg Bhm  1661~1733 합창, 오르간 연주자
얀 아담스 라인켄 Jan Adams Reinken 1623~1722 오르간 연주자

 

II. 아른슈타트 시대 (L'époque d'Arnstadt, 1703~1707)

바흐는 학업을 이어나가던 1702년 후일 졸업후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셍게르 하우젠(Sangerhausen)에서 첫 연주자 오디션을 가지지만, 이미 내정자가 정해져있던(손자승계)인사에 탈락하고 만다. 1703년 3월, 학업을 마치고 나서 튀링겐 바이마르(Weimar)에서 다행이 취직자리가 잡히는데 당시 작센-바이마르 공작 요한-에른스트3세(Johann-Ernest III de Saxe-Weimar, 1664~1707, 재위1683~1707)의 궁정에 궁정음악가로 취직이 된 것이였다. 이 궁정에서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로서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취직한지 6개월만인 1703년 9월에 바이마르 남서쪽 아른슈타트(Arnstadt) 생 보니파스(Saint Boniface)교회가 열림에 따라 설치된 새 오르간 검사(개관전 오르간 검사)와 더불어 이 교회의 연주자 지위를 얻게 된다. 돈도 넉넉하게 주고 새 오르간을 사용함에 따라 바흐에게 있어서는 기회였던 것 이였는데 그러나 마냥 좋은 조건속에서도 트러블은 있었으니, 바순 연주자 요한 하인리히 가이어스바흐(Johann Heinrich Geyersbach)와 트러블이 생기는데 이는 바흐가 이들의 음악수준을 높이는 과정에서 발생한싸움이였는데 가이어스바흐는 이를 담아두고있다가 각목으로 바흐를 공격함에 따라 바흐는 칼로서 그 응답을 하게 되면서 이 난투극으로 법정까지 가게된다. 

어찌저찌 1705년에 당대의 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를 만나기위해 뤼베크까지 걸어감(서울~부산거리보다 조금 더 긴 거리). 북스테후데는 바흐의 비범한 재능과 열정에 본인이 맡고있던 뤼베크 교회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는데, 일련의 조건으로 성사되지 않고 다시 아른슈타트로 돌아온다. 그러나 장기간 자리를 비운 바흐에 대한 불만(고퀄선호로 인한 트러블, 쌈박질 포함)들이 여러 일들과 엮이면서 이직을 준비하는데, 다행히 뮐하우젠에 채용된 1707년 사표를 던진다. 그러나 뮐하우젠에서도 도시가 너무 보수적인 개신교 도시에다가 강력한신앙심까지 요구받으면서 예술전체가 배척당하는 분위기로 교회음악을 만들라는 요구까지 받으면서 비교적 사고가 자유로웠던 바흐에게는 답답한 곳이였기에 1708년 이곳을 다시 떠난다.    

 

III. 바이마르 시대(L'époque de Weimar, 1708~1717)

모종의 일들이 있었던 아른슈타트, 뮐하우의 생활을 접고 바흐는 다시 바이마르 궁정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5년만인 1708년이다. 이때부터 바이마르 시대라 하는데 1708년부터 1717년까지 지속되고 이 시기에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1714년~1717년까지는 앙상블 팀(궁정콘서트마스터)까지 관리하게된다. 다시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복귀하면서 사실상 연주와 더불어 오르간 곡 작곡이 이곳에서 대부분 이루어진다. 매달 1곡씩 교회 칸타타가 작곡되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1세의 이복동생 요한 에른스트(Jean-Ernest de Saxe-Weimar, 1696~1715)공자가 네덜란드로 여행갔다가 귀국길에 비발디(Antoino Vivaldi, 1678~1741), 알비노니(Thomas Albinoni, 1671~1751)최신곡악보를 가져와 바흐에게 건네주면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703년에 오르간 연주자로 있을때도 고퀄 연주자로서 명성이 자자했는데 더욱 연주실력이 늘게되면서 이번엔 독일 전역에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바흐는 이곳에 잘 적응하고 생활까지 넉넉했지만 문제는 윗사람이였다. 위에서 언급한 요한-에른스트 3세(Jean-Ernest III de Saxe-Weimar, 1664~1707, 재위1683~1707)와 공동재위하던 빌헬름 에른스트(Guillaume-Ernest de Saxe-Weimar, 1662~1728, 재위1683~1728)공작이 조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1세(Ernest-Auguste Ier de Saxe-Weimar, 1688~1748, 재위1707~1741)가 형 요한-에른스트3세가 사망하고 조카와 공동재위하고 있었는데 서로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강한 캐릭터들이라 권력투쟁이 많았는 바흐가 이과정에서 새우등이 터지는 꼴이 되기 전에 튀어나온다. 

 

IV. 쾨텐 시대(L'époque de Köthen, 1717~1723)

바이마르 궁정에서 나와 1717년 쾨텐궁정에서 악장으로 취임하게 되는데, 쾨텐을 다스리던 공작 레오폴트(Leopold d'Anhalt-Köthen, 1694~1728, 재위1704~1728)자체가 뛰어난 음악가로서 로마에 유학까지 다녀온 연주자로서, 바흐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쾨텐은 칼뱅주의 개신교성향이 짙은 도시로서, 음악의 간소화와 더불어 실내악등을작곡하게 되는데 이때 지금도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1046~1051)이 이때 나오게 된다. 바흐는 쾨텐의 분위기와 잘 맞았는지 쾨텐에서 작곡한 곡 분위기들 자체가 매우밝고 즐겁다. 그러나 이때 연애결혼을 했던 첫번째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Marie Barbara, 1684~1720)가 1720년 사망하면서 매우 심적으로 힘든시기를 보낸다. 그러다가 1년뒤 쾨텐 궁정 프리마돈나의 딸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 Wicke, 1701~1760)와 재혼한다. 쾨텐의 좋은환경도 1720년대 쾨텐 공작의 상관이였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Frédéric-Guillaume de Prusse, 1688~1740, 재위1713~1740)의 군재정 정책으로 인한 군비확장으로 인해 궁정 악단에 들어간 재정감소, 악단규모축소등에 후원금 삭감까지 환경이 급격하게 안좋아지면서 라이프치히로 가게 된다. 바흐는 이 쾨텐 시대때 아이들과 제자들을 위해 평균율(BWV846~869), 인벤션(BWV772~801)등을 작곡하게 된다.

 

V. 라이프치히시대(L'époque de Leipzig, 1723~1750)

바흐가 1750년 사망할때까지 머문 곳 라이프치히였는데, 1723년 쾨텐에서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칸토르로서 선임되는데 전임 칸토르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사망으로 인해 라이프치히에서 바흐를 선임한다. 27년간 이곳에서 사망할때가지 연주활동과 함께 음악활동을 이어나가며 27년간 수많은 곡들이 이때 나오게 된다. 

 

프리드리히 대왕

1740년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가 사망함에따라 아들 프리드리히가 프리드리히2세(Friedrich II, 1712~1786, 재위1740~1786)가 즉위함에 따라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 재위때 묻혔던 예술을 다시 살리면서 군주이자 플루트연주자였던 프리드리히2세가 바흐음악에도 관심을 보이게 되면서 1747년 바흐를 상수시 궁전으로 초청을 하게 된다. 이미 1740년 프리드리히2세가 즉위하면서 바흐의 둘째아들 카를-필리프 엠마뉘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가 궁정 건반 연주자로 고용되어 있었음. 1747년 바흐는 상수시 궁전으로 가 프리드리히2세를 알현하고 왕의 플루트 즉흥적 푸가 주제를 듣고 건반으로 연주하면서 모든 이들이 놀란 일화가 있는데,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서 곡을 다듬고 완성시킨 곡이 왕에게 헌정된 곡인 BWV1079이다.  

 

사망

1749년 뇌일혈로 시력이 악화되고, 1750년 돌팔이 안과 의사 존 테일러(헨델까지 실명시킴)가 집도한 백내장 수술을 2차례나 받으면서 더 악화되어 3개월동안 투병하다가 1750년 7월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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