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rdinand II du Saint-Empire, 1578~1637, 재위1619~1637
출생
1578년 신성로마제국 슈타이어마르크공국 그라츠(Graz)에서 아버지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2세(Charles II, 1540~1590, 재위1564~1590)와 마리-안 드 바이에른(Marie-Anne de Bavière, 1551~1608)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30년 전쟁의 피스톨 역할을 맡은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 사촌형 마티아스 황제의 승하이후 황제에 선출되지만, 뛰어난 정치력으로 신하들을 잘 조종하였고,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으로 인해 혼란을 스스로 자처한 꼴이 되어버린다.
즉위까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는데, 어릴때부터 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함. 가계도로 따지면 본인은 황제 후보에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사촌형들인 루돌프2세(Rodolphe II, 1552~1612, 재위1576~1612)와 마티아스(Matthais, 1557~1619, 재위1612~1619)의 권력다툼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딱히 개입안하면서 이둘은 모두 후계자가 전무했기에 페르디난트가 1619년 마티아스가 승하하기 전에 후보자로 오르게 된다.
즉위
사촌형 마티아스가 1619년 승하하면서 황제에 선출되어 즉위하게 된다. 종교개혁의 불씨가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 독실한 카톨릭 군주로서 개신교에 관한 관용적 태도가 1도 없이 탄압하고 몰아내버린 군주로, 즉위시기부터 이미 분열은 예견된 절차였던 것.
특히 개신교도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개종하지않을시 처형이나 타국으로 추방시키는 등의 강압적인 조치를 취하게 되면서 제국 내 민심도 흉흉해져버린다.
프라하 창 밖 투척사건
신성로마제국은 1555년 당시 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의 동생이던 사실상 2인자 페르디난트1세(Ferdinand Ier, 1503~1564, 로마왕재위1531~1564, 신성로마재위1556~1564)가 당해 열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각 영지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사실상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줬는데, 페르디난트2세 즉위부터 삐걱거리는 개신교와 구교와의 갈등은 1618년 5월에 한 사건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사건이 커지게 되어버리는데, 그 사건이 프라하 창 밖 투척사건이다.
1618년 5월 23일 오전, 보헤미아 수상부 청사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않음에 분개한 개신교도들이 2명의 섭정관과 비서관을 창문밖으로 던져버리는데 운좋게도 모두 다 살아남으면서 보헤미아내 귀족들이 30인 집행위원회를 구성해 보헤미아 독자적 헌법제정&군대소유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페르디난트2세를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왕을 즉위시키고 마는 일이 벌어진다[새로운 왕은 개신교 군주인 프리드리히5세 드 팔츠(Frédéric V du Palatinat, 1596~1632, 팔츠재위1610~1623, 보헤미아재위1619~1620)]. 프라하 창 밖 투척사건이 사실상 30년전쟁(1618~1648)의 발단이라고 보면 됨.
당연히 페르디난트2세는 가만히 두질 않고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페르디난트2세의 제국군이 승리하면서 프리드리히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을 가게되고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은 혹독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후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등등 유럽국가들이 참전하면서 유럽내 대전으로 번지게 되어버린다.
발렌슈타인
페르디난트2세는 30년전쟁 도중에도 황권을 강화시키기위한 정책을 펼치는데, 이때 전쟁을 수행중이던 페르디난트2세의 오른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장군(Albrecht von Wallenstein, 1583~1634)이 황제의 권위를 믿고 월권행위가 극심해지면서 제국내 영주들의 불만이 점점 커짐에 따라 자기가 채용한 발렌슈타인을 직위해제시켜버린다. 1630년 전쟁이 더 거세어지면서 다시 재등용시킬떄까지..
그러나 이때 스웨덴 왕 구스타프2세 아돌프(Gustave II Adolphe, 1594~1632, 재위1611~1632)가 전사하는 공적을 세우지만,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페르디난트2세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스웨덴과 협상을 시도했다는 것과 발렌슈타인이 보헤미아 왕이될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문으로 페르디난트2세가 이에 분개해 발렌슈타인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1634년 암살.
말년
프랑스가 제국의 힘을 두려워하면서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 재위1610~1643)와 총리대신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 de Richelieu, 1585~1642)이 30년전쟁에 페르디난트2세에 대항하는 쪽인 개신교측에 가담해 참전하게 된다. 프랑스의 참전으로 인해 안그래도 힘이 많이 빠진 제국으로서는 어떤 변수가 나올지 예측되지 않는 상황에서, 페르디난트2세가 병들어버리면서 누워버리고, 승하 1년전인 1636년 아들 페르디난트(페르디난트3세)를 사실상 후임자로 삼고 1637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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