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69대 영의정 윤원형(소윤)

Mintaka5 2024. 9. 1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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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 Won-hyung, 1503~1565, 영의정 재임1563~1565

 

출생

1503년(연산군9년) 경기도 파주군에서 아버지 파산부원군 윤지임(1475?~1534)과 어머니 이씨(이덕숭의 딸)사이에서 태어남. 본관은 파평.

 

배경

정치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로, 누나 문정왕후(1501~1565)가 정현왕후(중종의 어머니, 1462~1530)에 의해 중종의 3비로 1517년 간택되면서 책봉된다. 중종의 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1491~1515)가 아들 호(인종)를 낳다가 승하하면서 간택된 셈. 모두가 반긴 왕비는 아니였지만, 원자 호를 보호하는 명분과 장경왕후 윤씨와 가까운 친척인 덕에 후궁들을 자연스럽게 견제하고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이후 인종(1515~1545, 재위1544~1545)이 1년만에 승하하고 즉위한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이 즉위당시 11세에 불과하여 누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되면서 외척세력의 수장으로서 사실상 국정을 쥐고 흔드는 존재가 되는데, 1565년 누이 문정왕후가 승하하면서 윤원형의 입지도 약해지면서 유배되면서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소윤 대윤

아버지 윤지임(1475?~1534)에게는 5남2녀가 있었는데 윤원형은 7명중 막내였다. 누나 문정왕후가 1517년 중종의 3비로 궁에 들어간 뒤에 1533년(중종27년)이 되어서야 문과에 급제해 관직을 얻게 되며 출사를하게 된다.  다양한 직책들을 거치면서 지내다가 문정왕후가 원자 환(명종)을 얻으면서 윤원형과 윤원형의 친형 윤원로(1502~1547)는 환을 세자로 책봉시키기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 외척인 윤임(인종의 외삼촌)이 김안로와 손을 잡고 윤원형 일파를 탄핵하면서 윤원형은 야인이 된다. 

그러나 김안로는 권세를 부리다가 1537년 경원대군(명종)을 옹립시키려는 뜻을 가진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 했다가 양쪽 대가들의 공격을 받아 체포되고 유배보내졌다가 사사당한다. 김안로가 제거되고 윤원형이 다시 궁으로 복귀하고 윤임이 홀로 남아 윤원형과 대립을하게 된다.  

윤임은 명종의 이복형인 인종의 외삼촌으로서,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으로서 같은 윤씨로서 구별을 위해 윤임세력을 대윤, 윤원형세력을 소윤이라고 부르게 된다. 같은 윤씨라 윤임은 윤원형의 아버지 윤지임과 8촌형제지간이기도 했다.

 

인종 때

1544년 인종이 즉위하면서 윤임이 왕의 외척으로서 대윤이 떠오르던 시기였는데, 윤원형은 인종이 병약하여 오래 못살것이라 생각해 조카인 경원대군을 다음 국왕으로 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윤임과 갈등을 계속 이어나가는데, 1544년 말 대윤의 송인수(1499~1547)로부터 탄핵을받아 다시 쫒겨난다.

 

니들세상 끝까지 갈줄 알았냐?

그렇게 병약했던인종이 1545년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해버리면서 11세의 어린 조카 명종이 즉위하는데, 너무 어려 명종의 어머니이자 누이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윤원형은 외척세력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대윤 영수 윤임을 제거하고자 중종8남 봉성군(1528~1547)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대윤 일파들을 유배보내게 되는데, 이 사건이 을사사화(1545)이다. 

 

을사사화

1545년 윤원형(훈구)의 소윤(윤원형, 정순명, 이기, 임백령, 허자등)이 일으킨 을사사화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대윤이 봉성군을 옹립하려한다는 것을 문정왕후에게 고해바침으로서 대윤이 역모를 일으키려한다고 무고죄를 씌운 것. 

역모로 몰린 대윤은 말그대로 모두 숙청당하기에 이른다. 대윤의 영수 윤임(사림)은 유배가던 도중에 사사당함으로서 사실상 세력이 와해되어버린다.  이 을사사화때 대윤과 직접 연관되어있는 봉성군(1528~1547) 뿐만아니라 계림군(1502~1545)같은 종친세력들과 더불어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림들도 모두 역모로 몰아 처형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윤원형은 이때 그냥 이기회에 사림을 모두 쓸어버리고 훈구 일당체제로 하고싶었던 것 같다.  

 

양재역 벽서 사건 : 정미사화

윤원형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잠재적으로 자기에게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을 모두 없애버리기 위해 음모를 꾸미게 된다. 1547년 양재역(현 경기 과천~서울특별시 강남구 양재동일대)인근에서 명종과 문정왕후를 비난하는 익명의 벽서가 붙어 난리가 난다. 이 벽서안에는 명종과 문정왕후 뿐만아니라 윤원형을 포함한 소윤대신들까지 싸잡아 맹비난하는 정치욕이 써져있었다..   

이를 심각한 사건으로 인지한 윤원형은 벽서를 쓴 자를 찾기위해 수사를 진행하는데, 작성자가 나오지 않으면서 생각을 바꿔 이일을 빌미로 정적과 더불어 을사사화때 제거되지 않은 사림들을 제거하는데 이용한다. 얼마남지않은 대윤세력이 이때 거의 박살이 나버린다.

 

내가 마 왕의삼촌이다이? 

그렇게 소윤의 영수이자 견제세력이 없어진 최고 권력자가 된 윤원형은 본격적으로 권력을 이용한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집중하게 된다. 윤원형은 군주가 처리해야할 정무, 죄인처벌등을 모두 관리하고 국유지를 자신의 사유지처럼 사용하고, 기분나쁘다고 사람을 죽이고, 아녀자를 강간하는등 아주그냥 막장의 끝을 달리게 된다. 

윤원형의 황금기? 일 수도 있겠네.. 그렇게 하면서1563년 정1품 영의정(현 국무총리격)에까지 오르게 된다.  

 

최후

그러나 이러한 전횡도 1565년 누이 문정왕후가 병으로 승하하게 되면서 윤원형의 애첩인 정난정(1506~1565)이 윤원형의 본처였던 연안 김씨의 계모인 강씨가 윤원형과 정난정을 고발하여 그동안 저질러온 만행이 다 드러나게되면서, 윤원형은 양사의 탄핵을받아 모든 것을잃고 방귀전리(고향으로 내쳐지는)의 명을 받는다. 명종이 외삼촌을 차마 죽이거나 유배보낼 수 없었다는게 정설.

그 이후 정난정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정난정의 죽음을 보고 윤원형도 슬퍼하다가 5일만에 자살했다고 한다. 

권신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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