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wanghaegun de Joseon, 1575~1641, 재위1608~1623
출생
1575년 조선 한성부에서 아버지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와 어머니 공빈 김씨(김희철의 딸, 1553~1577)사이에서 서차남으로 태어남. 위로는 친형인 임해군(1572~1609)이 있다.
배경
어머니 공빈 김씨가 광해군이 태어난지 2년만에 사망하면서(24세) 당시 선조의 중전이였던 의인왕후(1555~1600)가 광해군 형제(임해군, 광해군)를 친자식처럼 키움. 3살위인 형 임해군은 제멋대로인 성격에 성격까지 포악해서 패악질이 심했던 탓에 민심을 잃은지 오래되었고, 임진왜란때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를 잘 이끄는 군왕다운 모습에 동인서인 할 것 없이 사실상 차기 국왕으로 점찍혀지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 선조가 이에 못마땅해했고, 이후에 태어난 이복동생 영창대군(1606~1614)의 정통성에 밀려 여러번 견제를 받게 되는등의 굴욕을 받는다.
세자, 임진왜란
앞서 배경에서 언급했듯이 형 임해군은 이미 민심으로부터 멀어져서 사실상 배제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했고, 당시 선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자질로 보았을 땐 광해군만한 인물이 없었다. 선조역시 방계출신 왕으로서 항상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여러 군들을 비교하여 세자책봉을 하기엔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였나보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피란길에 신성군이 병으로 사망하고, 후방의 방어를 맡기위한 분조(군주의 권력을 반으로 나누어 통치)의 필요성을 느낀 선조가 광해군을 임진왜란 발발2달만에 세자로 책봉하고 평양에서 분조를 맡게되었다. 이때 의병모집, 민심을 달래기위해 군량미로 민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등 인기를 얻게 된다. 이때 의인왕후의 양자가되어 세자로서의 정통성을 강화시키지만, 명나라에서는 거부. 가면갈수록 높아지는 광해군의 인기에 선조또한 광해군을 경계하게된다.
너무 큰 활약을 보이게되는 광해군이 명나라에서도 새로운 조선의 국왕으로 옹립시키려는 움직임에 더욱이 선조의 경계가 더 커진 것. 그래서 양위하겠다는 말을 15번이나 꺼내면서까지 광해군을 테스트할 겸 압박하지만 끄떡도 하지않는다.
임진왜란끝나도 피곤한일 연속이네..
1598년 드디어 7년간의 긴 전쟁이 끝나고 뒷수습을 하는 선조의 곁에 있으면서 같이 돕지만, 사실상 키워준 어머니나 다름없던 의인왕후가 서거하고 1602년에 선조의 새왕비인 인목왕후(1584~1632)가 궁에 들어오면서 1606년에 영창대군(적장자)을 낳게 되면서 광해군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는데..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부터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전쟁을 지휘하고 민심을 얻었던 광해군을 쉽사리 폐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욱이 선조가 승하한 1608년에도 영창대군은 불과 3살로서 통치가 불가피한 시점이라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교지를 내리고 승하하게 된다.
재위
1608년 15대 국왕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당시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당쟁을 수습하기위해 균일하게 대우시키는 등의 노력을 거치지만, 쉽사리 해결을 보지는 못한다. 이는 즉위 전 선조의 교지(세자 광해군을 왕위에 앉히고 왕비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를 몰래 자신의 집에 숨긴 유영경(1550~1608)이 혼란을 야기하게 되면서 이것이 더욱이 광해군의 불안감이 더 커지게되는 계기가 되면서 당쟁은 더욱 격화되어간다.
숙청
1608년 즉위에오르면서부터 혼란과 불안감으로 가득 쌓여있던 광해군은 1609년 친형 임해군을 유배보내 사사시키고, 1612년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켰던 김직재의 옥(유영경 잔당을 없애버리려고 꾸민 옥사), 1613년 계축옥사(인목왕후가 공빈 김씨와 의인왕후의 무덤에서 저주를 하고,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역시 부정축재를 하는등으로 인해 가문전체가 쑥대밭이되면서 영창대군역시 폐서인되어 유배에 위리안치이후 의문사로 사망), 1615년엔 이복동생 정원군(추존왕 원종, 1580~1620)의 차남인 능창군(인조의 동생, 1599~1615)까지 폐서인시키고 위리안치후 자결하게끔하는등 모든 위협세력을 제거하기에 이르게 되지만 이또한 서인에게 있어서는 반대의 명분으로 작용하게 끔 되버린다.
이과정의 핵심인물은 최측근이자 대북파인 이이첨(1560~1623), 유희분(1564~1623), 박승종(1562~1623)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전횡, 부정부패등으로 인해 광해군은 임진왜란때부터 쌓아온 민심을 점점 잃게 된다.
중립외교
임진왜란이후 명나라를 위협할만큼 커진 후금(청나라 이전)사이에 전쟁이 나게되면서 명나라를 도와주지 않고 중간입장에서 서서 이득을 취하면서 명분을 얻고자 함에, 명나라에선 당시 신하국으로선 있을 수 없는 행위를 하였다 하여 사대를 저버린 행위로 간주해 인조반정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지만, 이후 역사가들의 해석에서는 명줄이 다해가는 명나라에 붙었다가는 조선까지 패망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결정한 문제를 재평가하기 시작하면서 광해군의 새 평가가 등장하게되면서 이후 인식이 바뀌어지게 된다.
인조반정
1623년 한껏 억눌렀던 서인들과 남인이 능양군(인조, 1595~1649, 재위1623~1649)을 주축으로 한 세력이 군사를 일으켜 궁을 장악하면서 실각한 광해군정부는 폐위되면서 유배보내지게 되고, 이이첨3인방등이 처형되는등 급 마무리지어진다. 광해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위한.. 울타리 쳐놓고 못나오게끔 하는)되어 폐세자는 탈출하다 실패한 것을 인조에게 걸려 자진을 당하고 폐세자빈역시 자살.. 광해군의 부인역시 화병으로 사망.
한곳에좀 둬라..
1624년 이괄의 난으로 광해군이 힘을 받을까봐 두려운 인조가 강화도에서 태안(충청도)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도로 재배치, 1636년 병자호란(청나라 침공)때는 교동도로 옮겨짐. 그리고 이후 마지막 유배지인 제주도로 1637년 또 옮겨지게 되는데, 1641년 독살되어 사망하게 된다.
폐위된 왕으로서 묘호는 없고, 군시절작위인 광해군을 그대로 쓴다. 연산군과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