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조선의 군주

25대 철종

Mintaka5 2024. 8. 1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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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Cheoljong de Joseon, 1831~1864, 재위1849~1864)

철종,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31년 조선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에서 아버지 전계대원군 이광(은언군의 아들, 1785~1841)과 어머니 용성부대부인 염씨(1793~1834)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휘는 '이원범'이였다가 이후 '이변'으로 바뀐다.

 

배경

할아버지 은언군이 상계군(1769~1786)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면서 정조는 아우를 잃을까봐 여러번 직접 은언군을 도와주고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끔 왕으로서 다방면의 노력을 취하지만,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며 은언군에 적대적이던 정순왕후(1745~1805)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면서 강화도를 탈출하다 붙잡혀 강화 유수에게 탄핵을 당한다. 거기다 천주교를 사학이라고 규정하고 벗어나지 못할시 엄벌에 처한다는 정순왕후의 강한 정책에 마침 1801년 신유박해때 나인의 일방적 진술로 은언군의 정실부인 상산군부인 송씨(1753~1801)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상계군의 부인, 1770~1801)가 청나라출신 선교사 주문모 신부(1752~1801)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모두 사사된다.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이광(1785~1841)은 은언군의 서자로서 평생 품계와 작위가 내려지지 않게되는데 계속되어 조정에서 석방했다 노비로 격하되었다가 임시석방되며, 최종적으로 1830년에 석방되어 한성부로와서 1831년 훗날 철종이되는 이원범을 낳고 병으로 사망한다. 

 

강화도

그러나 원범은 1836년 남응중의 옥사('24대 헌종'편에 기록해둠)에선 은언군(1754~1801)의 손자로서만 언급된 반란이 실패하여 유배, 1844년 민진용의 옥사(헌종편에 기록해둠)등이 은언군의 손자이자 원범의 이복형인 회평군 이원경(1827~1844)을 왕에 옹립하려다가 실패하고 모두 처형당하고 회평군은 사사당한다. 원범은 이 사건에 또 연루가 되어버리면서 한성에서 다시 강화도로 가족들이 유배를 명 받으면서 강화도에서 사실상 어릴적부터 자라온다. 그리하여 아버지대부터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온 왕족으로 후에 철종이 강화도령이라고 조롱당하는 스토리가 이때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갑작스런 즉위

1849년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게되면서, 결국 살아남은 유일한 왕족인 원범이 25대 철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이미 어린시절부터 강화도로 유배를 가있었고 아버지 이광역시 작위가 없었던 탓(은언군의 서자이자 유배까지 간 반역자)에 원범역시 이렇다 할 작위가 없었다. 철종은 헌종에 의해(정확하게는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짐, 즉위하고 바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음)왕위계승자로 내정되고나서 아버지 이광을 전계군으로 추증하고, 철종으로 즉위한 후 전계대원군으로 격상시킨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러나 철종은 1849년 즉위당시 이미 권력을 장악했던 세도가 안동 김씨들의 권력에 휘둘려서 왕으로서 사람을 뽑을 수도, 정책을 결정할 수도 없었다. 거기다가 철종은 정통성역시 매우 빈약했는데,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1754~1801)의 서자인 아버지 전계대원군에, 본인역시 전계대원군의 서자로서 2대가 서출인 집안에서 왕이나왔으니 대신들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서출 출신 왕이라하며 조롱, 비하했다고 한다. 뭐 친부 전계대원군은 저렇다 쳐도 일단 철종은 표면적으로 순조(1790~1834)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문제는 아니였다. 그리고 1851년 김조순(안동 김씨의 수장, 1765~1832)의 조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데 이가 철인왕후(1837~1878)이며 이는 3대가 안동 김씨의 가문에서 중전이 배출된 셈(순조, 헌종, 철종)이 되는 것이였다. 

철종은 유배지에서 농사를 짓고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왕이되기위한 기본적 교육과 기초교육을 받지 못해서 대신들에게 학문적으로 소양이 부족해 정사는 신하들이 처리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해버려 술과 여자에 점점 가까워진다. 뭐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지만 대신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럼에도 철종은 대신들의 비리를 지적하고 직접 과거시험 합격자들중 제주도같이 섬에 있는 합격자들을 그 곳에서 교지를 받을 수 있도록 관리를 직접 제주도로 파견시켜 지급케 하는등의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 여러 노력으로도 세도정치가 더욱 고착되던 시기에 재위에 올라 더 민중들의 생활이 피폐해져가면서 민란이 발생하게 된다.

 

임술 농민 봉기

1860년(철종11년) 경주지방에서 최제우(1824~1864)가 동학을 창시하여 새로운 탄압과 동시에 교주 최제우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발생할 2개의 난의 불씨중 진주 민란이 동학교도 탄압에서부터 점점 피어오르게 되는데, 1862년 단성민란(양반 김령과 아들 김인섭이 환곡으로 인한 폐단을 해결하기위해 일으킨 민란), 진주민란으로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면서 점점 그 민란의 세가 커지기 시작하는데 지방 비리관리(관아 소속 관리중 특히 아전이 세금 징수 과정중 특히 많이 삥뜯음)를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수령(종6품 현감)을 붙잡는등 난리가 아주 크게 난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3정*(전정, 군정, 환정)의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임시 부서]을 설치해 해결방안 모의, 민란이 일어난 지역에 농민들을 다독이는 위무사를 파견해 달래고, 주동자는 처형하는등 나름 1862년 말 소강상태에 접어들긴 한다만 삼정이정청 설치 이후에도 제대로 삼정이 시행되지 않아 더욱 사회의 혼란이 가중된다. 

*전정 - 양전실시(세금징수관련)가 제대로 되지 않음, 군정 - 균역법(군역을 대신하는 군포를 줄이는 군역세법 개혁)에 구멍이 생김, 환정 - 환곡(쌀)대출제도로 이자를 받아 운영되는 국가적 대출인데 이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제일 극심했다.

 

 

승하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철종이 왕이 되고나서도 세도가문에 의해 자신이 할 수 있는게 많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게되면서 몸이 더욱 안좋아지다가 1864년 승하 한다. 철종역시 후사가 없이 사망해버려 직계왕조는 완전히 끊기고 방계로 빠지게 된다. 사도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남연군(1788~1836)의 아들 흥선군(이하응, 1821~1898)의 아들인 이재황(고종, 1852~1919, 재위1864~1907)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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