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한국어, 프랑스어)/조선의 군주

2대 정종(조선)

Mintaka5 2024. 8. 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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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jong de Joseon, 1357~1419, 재위1398~1400

 

 

출생

1357년 고려 동북면 귀주 사제에서 아버지 이성계(태조, 1335~1408, 재위1392~1398)와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1337~1391)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남. 본명은 이방과→이경.

 

배경

무인에 가까운 인물이며, 아버지 이성계와 형 이방우(1354~1394)등을 따라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동행했고 수많은 전쟁터에서 공적을 세운 인물이다. 1361년 아버지 이성계가 가별초를 조직하고 고려인, 여진인들로 구성된 1천여명의 사병에 속해있었는데 이방과가 가별초내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면서 군 지휘관으로서 경력도 쌓여 이후엔 가별초를 통솔하는 사령관으로서도 활동을 하기에 이른다.

 

황산대첩

1380년(우왕6년) 왜구가 금강 하구영역에 500여척의 함대를 이끌고와서 이전의 약탈과는 비교가안될정도로의 규모의 약탈과 방화등을 저지르고 백성들을 죽이고 여인들을 잡아가는 만행이 벌어짐에 따라 고려에서는 최무선(1325~1395)에게 명을내려 소탕을 지시하는데 최무선은 이미 이전 1377년에 화통도감 설치를 한 이후에 군에 화포가 장착된 상태였었는데 1380년 이때 부원수로 임명되어 심덕부(1328~1401), 나세(1320~1397)등과함께 화포를 이용해 500여척의 왜구의 함대를 모두 침몰시킨다.

탈출로가 사라지자 당황한 왜구는 내륙쪽으로 더욱 깊숙히들어와서 약탈을 자행하는데, 이제 이성계가 이끄는 가별초가 모두 탈출로를 잃은 운봉(전북 남원)에 집결한 왜구는 이성계의 군대를 맞아 황산에서 궤멸되는데, 이것이 황산대첩(1380)이다. 이때 이방과역시 부장장수로서 아버지와 함께 왜구를 격퇴했다. 

 

위화도 회군

1388년 우왕(1365~1389, 재위1374~1388)과 최영(1316~1388)이 주원장의 무리한 요구로 인한 고려-명나라의 실력대결로서 요동정벌을 기획하면서 5만여명의 군사로 최영을 팔도 도통사(최고사령관), 조민수(1324~1391)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임명해 요동 심양(현 중국 선양시)을 정벌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이성계는 이때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지만 묵살당하고 출전했다. 

평양에서 출발하여 출전하는 과정에서 행군도중 압록강 위화도(현재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에 진을 치는데, 장마철(6월)큰 비로인한 압록강 범람으로 환자가 발생하여 행군을 멈추고 행군을 의견을 조정에 상소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받아들이지 않고 진군을 명함. 이때 이성계가 올린 상소의 4가지 내용이 사불가론이다.

  사불가론 내용4가지
1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규모자체가 비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공격에 성공하더라도 후폭풍이 클 것이다).
2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현재 장마로인해 군량미를 옮기는데 무리가 많다. 가을로 늦추자).
3 고려 전역의 군사를 동원해 멀리 나아가면 그만큼의 후방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왜적이 침입 할 것이다.
4 장마철의 습도로인해 활이 느슨해지고, 역병을 앓을 것이므로 즉시 회군시켜달라.

그렇게 해서 계속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최영은 김완(환관)에게 감찰관으로서 위화도의 이성계를 닦달하라는 명을 받고 오게되는데, 김완은 이성계에게 즉시 진군하라는 왕명을 내리지만 이성계와 조민수는 한번더 회군을 요청하지만 또 묵살. 이렇게 보름정도의 대기끝에 이성계는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회군하게 된다. 이것이 위화도 회군.

이 회군에 당황한 우왕과 최영은 5만의 군세를 극복못하고 체포되어 최영은 귀양후 처형,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추방당하고 아들 창왕(1380~1389, 재위1388~1389)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몽주 척살 계획

보통 이방원(정안대군: 태종)이 정몽주(1338~1392)를 척살할 계획을 홀로 세우고 홀로 죽였다고 알려져있지만, 이방과역시 이 계획을 세울 때 동참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성계는 정몽주 제거에 부정적이였고, 맏형역시 반대를 하였기 때문에, 이방원으로서는 이방과의 지지로 이 계획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짐. 아우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고 이방과가 공양왕(1345~1394, 재위1389~1392)에게 정몽주의 죽음을 통보하면서 사실상 협박을 하게 되고, 공양왕은 이 사건이후 권력을 사실상 잃게 된다.

 

조선

1392년 아버지 이성계(태조)에 의해 조선이 건국된 후 이방과는 영안군에 봉해진다. 고려왕조의 붕괴로 모든 직위와 군호를 거부한 형 이방우(1354~1394)는 술로 세월을 지새다가 1394년 사망. 사실상 영안군이 장남이라고 봐도 무방한 시점이 된다.

 

1차 왕자의 난

아우인 이방원(정안군)이 아버지 태조가 공도없고 어린 이복동생 이방석( )을 세자로 세우는데 있어서 불만을 품어 1차 왕자의 난(1398년)을 일으켜 신덕왕후(태조의 둘째부인)소생의 이복동생 무안군 이방번(1381~1398), 세자 이방석(1382~1398)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로인해 정안군의 뜻에 따라 반강제로 이방과가 세자로 앉게되는데, 태조는 이 난이 발생한지 일주일 정도만에 세자 이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됨으로서 이방과가 조선2대 정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1398년 갑작스럽게 즉위를 한 정종은 즉위후 세자책봉과정에서 아우 이방원(정안군)을 세제(왕의 동생으로서의 계승자리)로 책봉하려 했으나 아우를 양자로 입적시켜 정안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1400). 뭐 정종역시 이미 즉위전부터 아우 이방원이 모든 실권을 잡고있었기에 정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사냥을 다니는정도로 한가하게 궁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세종때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집현전이 정종원년인 1399년 설치되게 되고, 관리의 청탁금지법(분경금지법), 법전 정비(조례상정도감:법전편찬기구설치), 사병을 혁파시켜 군권을 국가로 환수하게 하는등 건국초기 정비를 어느정도 하게된 왕이다. 

 

2차 왕자의 난

이번에는 정안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한 데 있어 불만을 가지던 회안대군(이방간, 1364~1421)과 박포(?~1400)가 1차 왕자의 난때 1등공신에 책록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2차 왕자의 난(1400)을 일으킨다. 만.. 패배하고 체포되지만 친형제간의 골육상쟁을 더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정안대군은 형의 목숨은 보존하려고 용서하려고 하지만 신하들의 맹렬한 반대 주청으로 유배를 보낸다. 박포는 유배간 이후 처형.

 

1400년 이후

정종은 이미 형제들간의 반목을 걱정하여 재위중에 형제간의 관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장남이자 왕으로서, 집안의 가장으로서 많은 보호를 하게 된다. 2차 왕자의 난 이후 몇달 뒤 정종은 세자이자 아우인 정안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는데, 이때가 1400년 11월이다. 정안대군은 조선3대 태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상왕으로 물러나지만, 19년이나 더 사는데 이때 정사에서 물러나 사냥, 격구, 연회, 온천여행등으로 세월을 보낸다(부럽네 이건...). 1418년 조카인 충녕대군(세종)이 4대 세종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정종은 태상왕(!?)이 되는 상황도 나오게 된다.

1419년 63세로 당시로서는 장수한편으로 승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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