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니콜라오5세

Mintaka5 2024. 7. 15. 13:11
반응형

본명 : 톰마소 파렌투첼리 Tommaso Parentucelli

Nicolaus PP. V, 1397~1455, 재위1447~1455

니콜라오5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97년 이탈리아 사르차나(Sarzana)에서 아버지 바르톨로메오 루칸도 디 파렌투첼리(Bartolomeo Lucando di Parentuccelli)와 어머니 안드레올라 보시 델라 베르콜라(Andreola Bosi della Verrucola)사이에서 톰마소 파렌투첼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남.

 

배경

의사였던 아버지로 금전적 형편은 아예 나쁘지 않았지만 재물에 욕심이 크게 없던 터라 가난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하며 나름 만족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를 어릴때 잃고, 학업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일단 일부터 시작한다. 

피렌체로 건너가서 스토리지가문(Strozzi)과 알비치(Albizzi)가문에서 가정교사일을 하면서 수입을 충당하는데, 이때 인본주의자 앰브로지오 트라베르사리(Ambrigio traversari, 1386~1439), 초기 르네상스 인문학자 포지오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 역시 인문학자 레오나르도 브리니(Leonardo Bruni, 1370~1444), 철학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등을 이때 만나게 된다.

 

본격적으로 뛰어볼까?

가정교사 일을 그만두고 신학자의 길로 가기위해 피렌체에서 볼로냐로 오게되는데, 볼로냐 대학교에서 신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볼로냐의 주교이자 정신적 후원자이자 스승인 니콜로 알베르가티(Niccolo Albergati, 1373~1443)밑에서 봉사하며 성직자의 일을 배운다. 

학자적 성향이 있던 톰마소는 서적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자신의 학문적 지식을 역병으로 인해 페라라에서 열리기로 했던 공의회가 장소가 피렌체(피렌체 공의회, Concile de Florence, 1444)로 옮겨지는데, 이때 톰마소는 피렌체로가서 자신의 능력을 이때 써먹으면서, 이때 참석한 교황 에우제니오4세(Eugenius PP. IV, 1383~1447, 재위1431~1447)는 톰마소를 통해 동로마제국의 동방 정교회와의 종교적인 합치를 선언함으로서 성공적으로 공의회를 마친다. 이때는 톰마소의 스승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이 선종하고, 톰마소가 볼로냐의 주교로 임명되어있던 상태였는데, 볼로냐의 시민들은 톰마소를 주교로서 인정하지 않고 시위를 벌이면서 퇴진을 요구하게되면서, 교황 에우제니오4세는 톰마소를 교황청으로 불러들이는 동시에 프랑크푸르트 교황특사로 파견시킨다(빨리 튀어).

프랑크푸르트로 파견시킨 이유는, 1439년에 바젤 공의회라는 분열주의 공의회와 대립하며 선출된 아마데오8세 드 사부아(Amédée VIII de Savoie, 1383~1451)가 대립교황 펠릭스5세로서 바젤 공의회에서열린 콘클라베에서 선출되며 교황 에우지니오4세와 대립하게 되면서 신성로마황제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기위함이였다(당시 신성로마제국 수도가 프랑크푸르트). 에우제니오4세가 주관하는 피렌체 공의회에서 동로마제국의 동방 정교회와 합치를 통해 교회의 분열을 막고, 바젤 공의회로 선출된 펠릭스5세를 누르기 위함이였다.

여차저차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로마로 돌아간 톰마소는 성공적인 외교술로 인한 보상으로 교황 에우제니오4세로부터 사제급 추기경으로 승품된다. 

 

행정교황

1447년 교황 에우제니오4세가 선종하면서, 이전부터 외교적으로 수많은 성과를 낸 톰마소 추기경이 콘클라베에서 교황 니콜라오5세(Nicolaus PP. V, 1397~1455, 재위1447~1455)로서 선출된다. 니콜라오라는 명은 어릴적 자신의 정신적, 물질적인 스승이자 지주였던 니콜로 알베르가티(Niccolo Albergati, 1373~1443)를 기리기 위해 니콜라오라는 이름을 선택하게 된다.

교황에 오르고, 1448년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3세(Frédéric III, 1415~1493, 재위1440~1493, 황제대관식1452년)와 바젤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철회하는 차원에서 빈 협약(Le concordat de Vienne, 1448)을 체결하면서 대립교황 펠릭스5세를 물러나게하면서 유일한 교황이라는 인정을 받아낸다.

재위기간동안 행정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으로서 실천했는데, 위의 일들처럼 외부의 위협에 대비해 로마 시 요새를 강화, 도로포장, 급수시설정비를 하여 수돗가를 만들어 시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위해 노력하였다.

 

인문주의 발전

인문주의, 예술등에 후원도 아낌없이 했는데, 이전교황들때까지만 해도 인문주의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이단을 양성하는 불건전한 학문으로 지목받아 안좋게 봤는데, 니콜라오5세는 로마의 문화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여 유럽전역에 학자들을 데려오기위한 작전을 쓴다. 

그 대표적인 일화로 카톨릭, 이교도를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 역사책들을 인문학자인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에게 시켜 라틴어로 번역하게 시킨다.

*로렌초 발라는 니콜라오5세 전임교황 에우제니오4세에게 교황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선고받는데, 교황과 적대적이던 아라곤의 알폰소5세(Alphonse V, 1396~1458, 재위1416~1458)의 중재로 화형을 면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니콜라오5세가 불러들인 것.

이후 오스만제국으로부터도 9만여권의 서적을 받아내서 바티칸 도서관을 설립하고 학자들의 연구환경까지 마련해주면서 대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말년과 선종

재위 6년째인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2000년 로마역사가 끝이난다. 당장에 도움을 주기위해 교황의 군대까지 보내지만 수도가 함락되면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됨. 이때 도움이 되지 못하여 충격을 많이 받았고, 1455년 통풍으로 선종.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