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출생
1756년 신성로마제국령 잘츠부르크(Salzbourg)에서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 1719~1787)와 어머니 안 마리 페틸(오스트리아: 안나 마리아 페틸, Anna Maria Pertl, 1720~1778)사이에서 태어남.
아버지 레오폴트도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이자 작곡가였고, 어머니는 잘츠부르크 법원소속 공무원의 딸이였음. 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령으로, 바이에른 공작령에 속해있었고 이탈리아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에 관문같은 마을로 인구1만명으로 당시로선 중소도시급. 1750년경 오스트리아 인구가 300만명정도였다고 함.
유년기
레오폴트와 페틸사이엔 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볼프강의 누나 마리아 안나(1751~ )와 볼프강 2명만살아남고 나머진 다 일찍 사망해버린다. 볼프강은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는데, 이름은 아버지 레오폴트가 지은 것.
어릴적부터 유달리 똘끼가 충만, 수학을 좋아했고 무한한 상상력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습성을 가졌다고함(mbti를 했으면 N아닐까...) 그래도 아버지 레오폴트가 가정적인 편이라 집안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화목한편.
첫 음악스승은 아버지 레오폴트였는데, 누나 마리아 안나(Maria Anna, 1751~1829)와 음악을 같이 배우기 시작함. 3살무렵(1759년)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걸 아버지가 목격하고, 본격적으로 모차르트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스승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아버지가 찾은 스승은 다름아닌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프랑스어:장-크리스티앙 바흐,Jean-Chrétien Bach, 1735~1782)였다. 요한은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막내아들이다. 교향곡에 몰두한 크리스티안은 볼프강에게 하프시코드, 작곡, 바이올린등을 가르치면서 역시 볼프강의 천재성을 목격한다.
1762년에 볼프강이 작곡한 첫 작품(미뉴에트G장조, Minuet G major, KV. 1)은 당시 6살의 볼프강의 천재성의 시발점이 된 작품으로서 어린 볼프강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스승 크리스티안은 1762년부터는 당시 영국 군주 조지3세(George III, 1738~1820, 재위1760~1820)의 부름(샬럿 왕비의 음악교사로서)으로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겨 오페라 작곡을 계속하는데 어린 볼프강을 런던으로 불러 같이 연주를 하게되는데 이후 볼프강은 본인의 교향곡을 발전시키는 본보기를 제대로 삼게 됨.
1762년 이후
1762년이후 아버지와 누나 마리아 안나와 같이 1766년까지 긴 음악여행을 떠나게 됨. 볼프강은 각 국가를 돌아다니면서, 궁정과 군주, 귀족들앞에서 연주를 하면서 보상을 받는데, 이때 물론 볼프강의 뛰어난 기교에 감탄하는 긍정적인 파들이 있었지만 한낱 원숭이처럼 기교를 부리면서 사기를 치고 다닌다라는 말도 같이 나돌게 됨. 대표적인 예시인물로 런던 박물학자 데인스 배링턴(Daines Barrington, 1727~1800)이 레오폴트에게 '학식있는 원숭이'라고 조롱했을정도.
이후1767년 11세의 나이로 첫번째 오페라인 아폴로와 히아킨투스Apollo et Hyacinthus(K. 38)가 초연된다(잘츠부르크 대학부속 고등학교 학생들이 연기함).
미세레레 Miserere
1770년부터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여행하는데, 특히 로마에 방문했을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 1582~1652)주교의 작품 미세레레(Miserere, '불쌍히 여기소서', 너무 아름다워서 교황청에서 이 곡을 로마 밖에서 연주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 상태였음)를 들으면서 이 곡을 완벽하게 필사해냈다고 함. 물론 이 대사건으로 교황청이 발칵 뒤집혀져 당시 교황 클레멘스14세(Clemens PP. XIV, 1705~1774, 재위1769~1774)는 볼프강의 천재성에 처벌대신 훈장을 수여한다(황금 박차 훈장, 교황이 수여하는 훈장).
이 이후로 이탈리아전역에 볼프강의 명성이 전달되며 볼로냐의 학자이자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제 지오바니 바티스타 마르티니(Giovanni Battista Martini, 1706~1784)로부터 고전의 양식을 소개해주고, 당시 20세 이상만 입학가능했던 필하모닉 아카데미(L'Académie philharmonique)에 입학시키면서 이때부터 오페라를 공부하게 되지만, 자유분방한 볼프강의 특성상 크게 얻는건 없었지만 색채하나가 더 추가된 셈. 이후 1772년까지 오페라 ' 폰토 왕 미트리다테' (Mitridate, re di Ponto, 1770), 오페라-오라토리오 '베툴리아 리베라타' (La Betulia liberata, K.118, 1771), 오페라 '세리아' (Lucio Silla, 1772)등을 선보이게 된다.
대주교와의 갈등
1772년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후, 당시 새로 즉위한 계몽적 진보성향을 띤 잘츠부르크 대주교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만스펠트(Hieronymus von Colloredo-Mansfeld, 1732~1812, 재위1772~1812)가 이탈리아 음악에 매우 심취했는데, 그 취향을 모차르트 부자에게 종교적 성향의 곡을 작곡하라고 요구(사실상 강요)를 하는데 조건이 걸린 작업에 어려움을 겪은 볼프강이 작곡을 대주교가 만족할만큼 성의를 다하지않으면서 관계가 악화가 된다. 아니 오히려 이런상황에 볼프강은 더욱 맛보라는 식으로 더 창의성을 보인다. 이때 나온 곡이 교향곡 25번(La Symopnie K.183/173db, 1773년작) 으로서 교향곡40번과 더불어 유일한 단조곡들이다. 이때부터 작곡의 감정파장이 더욱 벌어지게되는 시기.
잘못 걸릿네..
수도 빈에서 요제프 하이든을 만나면서 하이든 역시 모차라트의 비범함을 알아보게 된다. 이때부터 사실상 교류가 시작되는데 지루한 잘츠부르크를 탈출할 명분이 섰다고 봐도 될듯. 이후 1777년 대주교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는데 이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후 이 실세 대주교의 영향력이 다른 국가에까지 전달이 되면서 어떤곳에서도 취직이 되지 않아서, 고생길이 열리게 된다. 어머니 페틸과 같이 동행하면서 신성로마제국 도시들을 거쳐 파리까지 가게되면서 노력을 하지만 어머니가 1778년 병에 걸려 사망. 이후 불만에 가득찬 볼프강은 계속해서 뛰어다니면서 자기 자신을 홍보하고 노력하면서 이 장기간 방황이 볼프강의 인간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데 기여하게 된 시기라고 봐도 될 듯 하다.
하... 세상 더럽네
이후 1779년 아버지 레오폴트의 부름으로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는데, 아버지또한 볼프강의 실책으로 취직을 못하고있다는 걸 잘 알고있었고 자식의 잘못을 대신해 대주교를 직접 면담하며 설득을 한 결과 다시 음악가로서 활동을 할 수 있게되게 한다.
그러나 반항이 넘치던 볼프강은 뭐 이런곳에 다시와서 작업을 해야한다니 하면서 불만이 넘쳤지만... 어쩔수가 일단 먹고살아야지...
대주교는 넉넉한 녹봉을 볼프강에게 약속하면서 이전 볼프강의 직책 콘체르트 마이스터(Konzertmeister)를 다시 맡긴다. 감금생활이라고 느꼈던 볼프강에겐 이때가 암흑기라고 봤어야 하지만 교향곡3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교향곡등.
더 위로 올라가자
1780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Marie-Thérèse, 1717~1780, 재위1740~1780)가 서거하면서 공동재위를 하고있던 아들 요제프2세(Joseph II, 1741~1790, 재위1765~1790)의 궁정에 들어가게 됨. 이때부터 죽을때까지 빈에서 독립을 하게 된다(이제 생계걱정 시작).
1781년 신성로마황제 요제프2세의 초청으로 호프부르크 궁전으로 가게되는데, 이때 당대의 건반악기 거장 무지오 클레멘티(Muzio Clementi, 1752~1832)와의 연주대결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워낙 용호상벽인 두 음악가의 연주를 보던 요제프2세는 무승부로 선언하고 둘다에게 보상을 지급시키게 된다. 이후 클레멘티 역시 모차르트에 대해 비범한 연주자라는 말을 남기게 된다(역시 고수는 고수를...). 이후 1782년부터는 요제프2세의 오페라 곡 요청으로 오페라에 더 집중하게 된다.
당시의 유행 계몽주의에 심취해있던 모차르트는 1784년 프리메이슨에 들어가 한달만에 길드마스터가 되면서 이때도 역시 대곡이 나오게 되는데 1791년 사망직전 그 유명한 '마술피리'(프리메이슨 오페라, La Flûte enchantée k.620, 1791)를 작곡하기에 이른다
1786년 피가로의 결혼 초연 (Le nozze di Figaro, 1786), 교향곡 38번 '프라하' ( La Symphonie no.38 k. 504, 1786), 돈 조반니 (Don Giovanni, K. 527, 1787)등을 작곡하게 됨. 이런 만족스런 곡들로 요제프2세는 궁정 실내악 연주자로 임명하게 된다.
요제프2세 재위기간은 볼프강에겐 황금시기인데, 이땐 귀족, 귀족자녀들의 음악수업 수입 뿐만아니라 연주회를 하고나면 잘츠부르크의 월급에 해당하는 수준의 수입이 생기는등 금전적으로는 여유가 있을 시기였다.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 레오폴트와 남다른 유대감을 가졌던 볼프강인데 1787년 돈 조반니 초연 5달전 5월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돈 조반니를 작곡하고있던 볼프강은 충격을 받으며 이 곡에도 그 소식이 영향을 미치게 됨. 들으면 알겠지만 희극과 비극이 서로 공존하는 형태의 오페라.
레퀴엠
1791년 7월 알려지지 않은 신원미상의 인물이 마지막 작품 레퀴엠(RequieM, KV.626, 미완성)을 의뢰하게되는데, 당시 신원미상의 인물은 프란츠 폰 발세그 백작(Comte Franz von Walsegg, 1763~1827)으로서 현대에 와서 그 존재를 알게됨. 그러나 말년의 볼프강은 가난과 질병등으로 약해질대로 약해져있었는데, 일은 더 늘어났다. 1790년 요제프2세의 서거이후 즉위한 요제프의 아우 레오폴트2세(Leopold II, 1747~1792, 재위1790~1792)의 대관식을 위한 오페라(La Clemenza di Tito, KV. 621, 1791)곡을 작곡해야하는 상황에까지 놓이면서 더욱 건강이 나빠지게 된다.
결국 1791년이 끝나기 한달전인 12월에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한채 사망. 뭐 음모설이 여러개 돌긴하나(ex, 살리에리가 독살했다든지).. 음모론은 음모론으로서 개인이 알아서 조용히 판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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