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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하이든

Mintaka5 2024. 7. 8.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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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Joseph Haydn, 1732~1809

요제프 하이든,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732년 신성로마제국령 오스트리아 로라우(Roharu)에서 수리공이자 아마추어 하프연주자인 아버지 마티아스 하이든(Mathias Haydn, 1699~1763)과 로라우 백작(Friedrich Auguste, comte de Harrach-Rohrau, 1696~1749)의 요리사인 어머니 안나 마리아 콜러(1707~1754)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남.

어릴때부터 음악을 접했는데, 특히 사촌형인 요한 마티아스 플랑크(Johann Mathias Franck, 1708~1783)로부터 기초를 배우게 되는데, 플랑크는 하인부르크의 합창단 대장이였는데 이미 어릴때부터 활동을 했다고 함. 이후 요제프의 동생이자 음악가인 미카엘 하이든(Michael Haydn, 1737~1806)역시 플랑크에게 기초를 배운다. 

 

빈으로

소속된 음악가가아닌 독립적인 음악가가 되고싶었던 요제프는 교회음악가라는 직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 고집을 겨우 꺾어 성가대에서 활동하는 정도로 최소수입을 벌어들이게 됨.  1750~1752년경에 빈에서 머물당시 짤막하게 연주알바를 뛰어다니면서 매우 힘겹게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조금씩 소문이나서 귀족자녀, 귀족에게 레슨을 하면서 수입을 벌고, 빈 발레단 직원이 되면서 수입상태가 조금 나아진다. 

 

작곡

카를 필리프 에마뉘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의 음악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57년 카를 요제프 폰 퓌른베르크 남작(Carl Joseph von Fürnberg, 1720-1767)이 요제프를 그의 성에서 열리는 실내악 연주세션에 초대를 하면서 그곳에 간 요제프는 처음으로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게 되는데, 그 곡이 바로 하이든의 현악 4중주 2번이다(J. Haydn - Hob III:2 - String Quartet Op. 1 No. 2 in E flat major). 이후 퓌른베르크 남작의 추천으로 카를 요제프 폰 모르친 백작(Carl Joseph von Morzin, 1717~1783)의 음악감독으로 취직하면서 16명으로 구성된 챔버형 오케스트라를 감독하게 됨.이때 미래의 처제를 만나게 되는데, 테레사 켈러(Theresia Keller, 1733~1819)는 수도원에 갈 예정이였기 때문에 결혼을 성사시킬수 없어서, 자기보다 세살위의 언니 마리아 안나 테레지아 켈러(Maria Anna Theresia Keller, 1730~1800)과 결혼하기로 하게 됨. 둘 사이 자녀는 없음.

그러나 이후 모르친 백작이 재정위기에 처하게되면서 오케스트라단을 해산하고 요제프도 실직한다. 이후 요제프는 헝가리의 니콜라1세 요제프 에스테라지(Nicolas Ier Joseph Esterházy, 1714~1790)궁정으로 들어가 다시 재취직한다(1761년). 니콜라1세와는 30년넘게 인연이 이어지는데, 음악애호가였던 니콜라1세는 요제프에게 물신양면으로 지원하고 요제프역시 이전과는 다른 편한 분위기에서 악장에 오르게 되며 스스로의 음악과 대중적으로도 음악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1790년 니콜라1세가 서거하고난 다음 파울 안톤(Anton, Esterházy de Galántha, 1738~1794)이 오른이후 음악에 애착이 별로없던 안톤으로 인해 요제프는 몇년간 떠나있었는데 런던에서 다시 안톤의 서거소식을 듣고 그다음으로 오른 니콜라2세(Nicolas II d'Esterházy, 1765~1833)이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다행이 1795년 다시 헝가리로 돌아오게 된다. 종교음악에 관심이 있던 니콜라2세를 위해 미사, 오라토리오등 작곡을 맡게 된다.

이 니콜라2세치하에 봉사하는 시간동안 100개가넘는 교향곡을 포함해 현악4중주, 협주곡, 소나타, 오페라등의 다양한 작품들을 작곡하기에 이른다. 수십년간의 에스테라지가문하에 요제프의 명성은 유럽전역에 알려져 존경받는 음악가이자 어른으로 받들어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테너 마이클 켈리(Michael Kelly, 1762~1826)의 회고록에 따르면, 4명의 작곡가가 모인 4중주에 대한 언급을 하는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비올라를 연주하고,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은 제1바이올린을, 남작 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Carl Ditters von Dittersdorf, 1739~1799)는 제1바이올린을 연주. 문서의 자료로서는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최초의 만남이 1784년에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1781년에 이미 빈으로 온 모차르트여서, 1784년보다 더 이전에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둘은 24살의 나이차이가 존재했지만, 상호 존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우정으로 절친이 되었다고 함. 볼프강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 1719~1787)에게 보낸 요제프의 편지에서 그 감정이 담겨져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1790년 니콜라1세 에스테라지가 서거하고 오른 음악에 크게 관심이 없는 안톤이 사실상 오케스트라단을 해산시키면서 하이든이 떠나있을 무렵 1792년 빈에서 요제프는 22세의 젊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을 학생으로 데려가게되는데,  둘의 성격차이가 아주 극명하게 차이가 나서 관계가 삐걱삐걱 거리다가 1794년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요제프는 베토벤을 친구이자 음악가인 알브레히트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맡기고(지도교수 교체..) 런던으로 떠나고 안톤이 1794년 서거하면서 위의 글처럼 1795년 다시 헝가리로 가게되는 스토리가 이어진다.

 

말년

1804년 72세의 요제프는 니콜라2세에게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을 추천하여 본인은 사실상 은퇴하게되는데, 1805년 형제이자 테너인 요한 하이든(Johann Evangelist Haydn, 1743~1805)과 1806년 음악가인 동생 미카엘 하이든(Michael Haydn, 1737~1806)이 1년간격으로 사망하게되면서 충격을 받게되면서 1806년이후로부터 더이상 작곡을 하지 않게되는데 사실상 나이가 75살에 가까웠던 시점(당시로서는 매우 장수한 편)이였는데 병든 몸으로 마지막 현악4중주 작품(String Quartet in D minor, Op.103)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1809년에 사망.

나폴레옹1세(Napoléon I, 1769~1821, 재위1804~1814, 1815)는 요제프 하이든의 장례식에 경의를 표하기위해 파견을 보낼정도. 장례식 2주뒤에 빈에 위치한 쇼텐 교회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레퀴엠(Requiem)이 연주되면서 장례식이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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