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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Mintaka5 2024. 7. 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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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베토벤,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770년 신성로마제국 본(Bonn)에서 테너인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와 어머니 마리아-막달레나 판 베토벤(Maria Magdalena van Beethoven, 1746~1787)사이에서 태어남.

베토벤은 가문명이라, 아버지 할아버지와 혼선이 올 수도있어 루트비히로 부르겠음.

 

어린시절과 활동

할아버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l'ancien, 1712~1773)도 음악가였는데, 본(Bonn)에 정착해서 바이에른 선제후 클레망-아우구스트 쾰른(Clément-Auguste de Bavière, 1700~1761, 재위1723~1761)의 악장으로 취직하여 활동을 하게됨.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역시 바이에른 선제후 클레망 궁정에서 활동하는 테너였는데, 알코올중독으로 베토벤을 포함한 자녀들을 학대하다시피 양육하게 됨. 음악을 한 아버지는 어릴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특출난 루트비히를 키우기로 결심하는데, 당시 유럽전역에서 연주로 휩쓸던 신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badeus Mozart, 1756~1791)를 본 아버지는 볼프강을 키운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 1719~1787)와는 다르게, 베토벤의 아버지는 강하게 아들 루트비히를 권위로 내려찍으며 사실상 학대에 가까운 스케줄을 소화시키게 한다.

그렇게 흥행에 성공하지 못할때면 루트비히를 폭행하고 술을마시고 폭언을 하는등 학대를 일삼는다.

이후 아버지의 알콜중독증세가 더 악화되고, 어머니가 결핵에 시달리는 1784년에 루트비히는  막시밀리안 프란츠( Maximilien François Xavier d'Autriche, 1756~1801, 재위1784~1801)의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고 사실상 가족을 책임지는 입장이 된다.

 

발트슈타인 백작

이후 루트비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백작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의 눈에 띄게되면서 1787년 루트비히를 빈으로 데려가서 그때 이미 요제프2세(Joseph II, 1741~1790, 재위1765~1790)빈 호프부르크 궁정에 들어가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만나게 됨.  이때 볼프강 앞에서 그의 곡을 연주하게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존경하던 음악가앞에서 연주를 하게된 루트비히로서는 아주 값진 시간이였을 것.

이후 발트슈타인 백작은 루트비히에게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를 소개시켜주면서 연주를 해보라고하는데 하이든마저도 감명을 받게되면서 빈에서 공부를 더 할것을 권유하게 됨.

발트슈타인 백작의 이름을 딴 곡 피아노 소나타21번 '발트슈타인'(Beethoven piano sonata no.21 'Waldstein')은 1804년 루트비히가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헌정하게 되는 곡이다.

 

1792년 하이든의 추천으로 빈에 오게되면서 명성을 쌓게되는데, 하이든과 성격이 달랐던 루트비히로서는 존경할만한 대상은 아니였고, 상호 존중은 했지만 사적으로 우정을 가지지는 못하는 사이가 됨. 이후 1794년 하이든은 영국 런던으로 떠남.  이후 루트비히는 독자적으로 빈 궁정에서 귀족들앞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높은 평가를 받게됨. 이때 많은 곡들을 귀족들에게 헌정하게 된다.

1796년부터 신성로마제국령 내 도시들로 콘서트 투어를 다니게 되는데, 대중들의 반응은 좋았으나,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그가 결코 모차르트가 될수 없다는 등 회의적인 시각으로 루트비히를 바라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기 직후부터

작곡 년도 곡 제목
1798 Romance no.2,  Piano concerto no.1
1798 Beethoven Piano Sonata No.8 'Pathetique' (비창)
1798~1800 현악4중주 1~4번, 프랑스어:Lequatuor à cordesno no.1~4, 영어:String Quartet op.18(no. 1~4)
1799~1800 현악7중주 op.20,  Septet in E flat major, Op.20

등의 걸작이 나오게 된다. 1800년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제 오스트리아를 너머로 유럽전역에 루트비히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

 

1802년

1796년부터 루트비히는 청각이 점점 떨어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사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 더 고립하게 되는데, 염세주의에 빠졌다는 평판까지 얻어질 정도로 조용히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었음.  이때 절망이 극에달해 자살까지 생각하지만, 포기하고 이 절망을 편지로서 표현을 하게 됨(루트비히가1827년 사망한 이후 발견됨, 1802년에 썼음)

이 인생일대의 위기를 넘기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작곡에 전념하게되면서 나온 곡이 교향곡3번 '영웅'(La Symphonie no 3 en mi bémol majeur communément appelée Eroica, 1802)이다. 이곡은 원래 당시 영웅적 스타일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장군(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옹1세, Napoléon Ier, 1769~1821, 재위1804~1814, 1815)에게 헌정하려고 했는데, 1804년 프랑스1제정 선포후 스스로 황제에 오르게되자 빡친 루트비히는 헌정을 취소하고 문구를 바꿔서 '영웅 교향곡'이라고 명명함.

 

오페라 실패이후

1800년대에 들어와서는 오페라에도 도전하는데, 1805년 '피델리오'의 흥행이 실패했는데, 오히려 베토벤으로서는 이때서야 가지고있던 청각장애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생활에 활력이 생기게 됨으로 동시에 작곡에도 활력이 붙게 된다.

작곡 년도 오페라 피델리오 흥행이후 작곡한 곡들
1805 Piano concerto no.4 op.58
1806 Symphonie no.4
1807~1808 String Quartet No.7 in F major op.59
1808 Symphonie no.5

 

엘리제

1810년 엘리제를 위하여(La Lettre à Élise, 1810)의 주인공 테레제 말파티 남작부인(Therese Malfatti, 1792~1851)과의 결혼계획이 실패함으로서, 이 곡을 작곡하게 됨. 낭만주의적 성향을 가진 베토벤은 이후 여러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지만, 결코 결혼까지는 가지 못했다. 이때의 감정을 담은 곡들은 다음과 같다.

작곡 년도 헌정자 헌정곡
1801 Giulietta Guicciardi  '월광 소나타'   Piano sonata no.14, op.27 no.2
1809 Thérèse von Brunsvik '피아노 소나타 24번'   Piano sonata no.24
1815 Maria von Erdody
안나 마리아 폰 에르되디 백작부인(1778~1837)
'첼로 소나타5번' beethoven cello sonata no.5 op.102

 

청각장애

1816~1817년 사이에 중병에 걸리고 청각장애마저 조금씩 더 악화되면서 또 한차례 위기가 오지만, 의지로서 한번다시 힘을 내게 된 루트비히는 사실상 해탈하게 됨. 1820년에 들어와서 청각이 완전히 상실되면서 사실상 암울한시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때 이후에도 걸작이 탄생하게 되는데,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의지하게 되면서, 점점 루트비히는 선대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의 메시아를 연구하게 된다.

이 연구들과 함께 루트비히의 마지막 작품들인

작곡 년도 작품
1820 피아노 소나타 30번  Piano sonata no.30 op.109
1821 피아노 소나타 31번  Piano sonata no.31 op.110
1822 피아노 소나타 32번  Piano sonata no.32 op.111
1824 '장송 행진곡' 교향곡9번  Symponie no.9
1825~1827 현악4중주 12~16번, Le quatuor à cordes no.12, 13, 14, 15, 16

교향곡 9번 '장송 행진곡'은 절친한 동지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에게 바치는 곡인데 상당히 복잡한 구성을 가지고있는데 1824년 작곡후 바로 초연되면서 성공을 거두게 됨. 주로 영국과 프로이센에서 승리를 하게됨. 

 

사망

1826년 폐렴에 걸린후 회복이 되지않으면서 3달가량 고통에 시달리다가 1827년 초 사망. 루트비히의 장례식에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면서 인상을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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