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Valois, 발루아

앙리2세

Mintaka5 2024. 6. 1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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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II(1519~1559, 재위1547~1559)

앙리2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19년 일드프랑스 생제르멩 앙레(Saint-Germain-en-laye)에서 아버지 프랑수아1세(François Ier, 1494~1547, 재위1515~1547)와 어머니 클로드 드 프랑스(Claude de France, 1499~1524)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남. 앙리라는 이름은 대부격 인물인 잉글랜드 헨리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1509~1547)의 이름에서 따왔다(프Henri '앙리'=영Henry '헨리'). 바로위 형 프랑수아 드 프랑스(François de France, 1518~1536)가 일찍 요절하는바람에 왕이 될 수 있었던 인물. 

 

상남자

태생적으로 강인하고 스포츠, 무예를 숭상해서 기사왕이라는 별칭까지 있을 정도로 상남자. 아버지 프랑수아1세역시 큰 덩치를 자랑하는데, 앙리2세도 그런 신체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덩치가 나름 있던편. 

프랑수아1세 통치시기, 유럽을 제패하던 합스부르크가문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와 전쟁을 치루게되는데, 워낙 강성하던 카를5세의 세력에 프랑수아1세가 포로가 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1526년 초 종전을 의미하는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수아1세가 풀려나는대신 그의 아들들이 마드리드에 사실상 인질이 된다(~1530). 

당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앙리2세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과묵하고 말이없는 성격이라고 말함.

 

메디치? 

어차저차 풀려나고 프랑스로 돌아온 뒤에 1533년 14세의 나이로 동갑내기인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와 결혼을 하게되지만..  앙리2세는 다른곳에 눈이 가있었고..

 

디안 드 푸아티에

아마 이사람에 대해서는 아는사람보다 모르는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역사서에서는 크게 다루지 않기때문. 여튼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 1499~1566)은 앙리2세의 애인인데, 카트린과 결혼한지 3년이 된 1536년부터 사귀기 시작했는데 이 때 앙리의 나이는 17살, 디안의 나이는 37살이였다...(20살연상, 현 대통령 마크롱부부의 나이차이는 깨지못함)

 

내 딸

1536년 형 프랑수아 드 프랑스가 일찍이 사망해서 도팽이 된다(왕위 계승 서열1위). 이후 프랑스군을 지휘하면서 이탈리아 땅에 주둔하고 있을 때, 1537년 몬칼리에리 공성전에 참여하는데 이때 만나게된 피에몬테 귀족여성 필리파 두치(Philippa Duci, 1520~1586)에게 첫눈에 반해 동침후 임신까지 직진한다.

이후 태어난 딸이 디안 드 프랑스(Diane de France, 1538~1619)인데 사생아라는 이유로 역사엔 잘 등장하지 못한다. 그래도 당시 앙리2세의 애인 디안 드 푸아티에가 이여자아이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을 따서 디안이라고 짓게끔 하고 대모역할을 하게 됨. 후에는 별다른일 없이 귀족남성과 결혼을 하고 조용히 그리고 오래(80세)살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짐.

 

고자아닌디?

디안 드 프랑스(Diane de France, 1538~1619)가 태어나고 장남 프랑수아2세(François II, 1544~1560, 재위1559~1560)이  태어나기까지 5~6년의 공백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까지만해도 세간엔 디안이 태어난걸 몰랐기 때문에, 앙리2세가 고자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데, 후에 디안의 존재를 인정하고 딸로 인정하고 난 이후 갑자기 앙리2세 고자설에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불임설이 돌기시작하면서(당시엔 심각한사항)이혼설까지 돌게된다. 여차저차 디안 드 푸아티에가 중재를 하게되면서 앙리2세에게 후계자를 위해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라고 권함(굴욕). 그래도, 여튼 1544년부터 줄줄이 6명이 태어난다. 

 

 왕이되긴했는데.. 슬슬 뭔가 복잡해지네

1547년 프랑수아1세가 서거하고, 앙리2세가 즉위하게되면서 인사를 쇄신하는데 순식간에 쇄신한다. 군 원수 몽모랑시가문과 정치계에선 기즈공작, 기즈가문 추기경까지 기즈가문이 슬슬 이때부터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중앙집권체제를 가지기위한 개혁을 시도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성공을 하여 나름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됨.

1555년엔 당시 금융의 메카 리옹에서 금융개혁을 통해 부채탕감을 시도해보고자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하고 3년후 삼부회에서 기부금을 따오는데 성공하는데 그침. 불가피하게 세금을 올린 결과, 폭동이 일어나지만 잔인하게 탄압을  하게되는점이 어두운면이긴 함. 그와 동시에 세금 징수개편에 힘을 써서 재무총관계열의 인력을 늘려 원만하게 세금이 징수되고 새는곳이 없는지 살펴보게끔 지시한다. 

 

종교문제

앙리2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당시 유럽을 휩쓸던 종교개혁자체를 반대하여, 위그노(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한다. 종교재판소를 열어 폭력적인 탄압을 진행하고 교회를 국가에 반납시키고, 심지어 위그노를 도운 카톨릭신자들에대한 탄압까지 진행하며 확실하게 근본부터 처리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런 억압정책에도 불구하고 위그노세력은 더 증가하게 되는데, 나름의 저항이였던 것 같다. 1559년엔 파리에 개척교회를 세워 행사,대회를 열며 열띤 운동을 펼치게 됨. 이후 앙리2세는 에쿠앙 칙령(L'édit d'Écouen, 1559)을 내리며 대응을 하게되는데 사실상 더욱더 열띤 박해라고 볼 수 있다.

 

어이없는 죽음

탄압을 이어오다가 1559년 6월 딸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Élisabeth de France, 1545~1568)와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과의 결혼 축하연에서 앙리2세가 직접 마상창시합에 출전하게 되는데, 상대편은 당시 스코틀랜드 근위군 대장인 가브리엘 드 몽고메리(Gabriel de Montgommery, 1530~1574)와 붙으면서 창날이 부러지면서 앙리2세의 투구 사이로 파고들어 파편이 박히는 사고가 나게되는데.. 부상에 의한 감염으로 인해 열흘만에 사망(40세). 

갑작스런 왕의 서거로 슬퍼하는겨를도 잠시, 이때부터 30년간 역사의 소용돌이가 시작되는 스타팅포인트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앙리2세의 죽음을 예견한 자가 있었으니, 우리에게도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Michel de Nostredame, ' Nostradamus', 1503~156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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