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Valois, 발루아

카트린 드 메디시스

Mintaka5 2024. 6. 13.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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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rine de Médicis(1519~1589)

출생

1519년 피렌체(Florence)에서, 아버지 로렌초2세 드 메디시스(Laurent II de Médicis, 1492~1519)와 어머니 알폰시나 오르시니(Alfonsina Orsini, 1472~1520)사이에서 1남1녀중 막내로 태어남. 아버지 로렌초는 카트린이 태어난지 한달만에 사망해버림. 

 

태어나자마자 고아

1519년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와 어머니 둘을 모두 잃게되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리는데, 아버지가 가지고있던 작위들도 모두 카트린에게 들어감. 고모에게 키워지는등 사실상 친척들에 의해 키워졌다고 보면 됨. 작은할아버지인 교황 레오10(Leo X, 1475~1521)세가 선종하면서 이 때를 노리고 후임교황 하드리아노6세(Hadrianus VI, 1459~1534)가 카트린이 가진 영지들을 몰수하게되면서 피렌체에서 쫒겨날 뻔 했으나, 하드리아노6세의 후임교황자 같은 메디치 가문사람인 클레멘스7세(Clemens VII, 1478~1534)가 즉위한 이후 살짝은 안정되는듯 하나,..

 

폭탄 터진다 터져..

1520,1530년대는 유럽은 사실상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이 제패하던 시대인데, 삼촌인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VII, 1478~1534)가 카트린에 있어서 도움이 안되는 삼촌이 된다.. 어린 교황이기도 하고(즉위당시45세), 강단도 강하고 강직한 교황이였다. 이때 그 유명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일으킨 종교개혁이 유럽전역에 미치는 시기. 

이전교황들까지 잘 지내던 합스부르크 왕가인데, 클레멘스7세가 여기다가 바로.. 적대적으로 상대를 해버리는데(상대를 못알아보고..) 무려 카를5세의 권력을 토막내겠다는 계획을..해버린다(용감하네..) 

뭐 사실상 카를5세가 나폴레옹1세 포지션이라고 보면 이해가 될 수도 있다. 카를5세와 적을 지고있는 국가들과 규합해서 동맹을 맺고 카를5세를 치게끔하는데(코냑 동맹) 빡이 칠대로 친 카를5세가 1527년 그 유명한 사건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로마 약탈(Sac de Rome, 1527)이 벌어짐.

여차저차 삼촌의 오락가락한 전쟁으로, 카트린이 있던 피렌체가 공격당하며(교황이 같은가문의 도시를 공격..) 죽을 위기를 벗어나서, 수도원으로 대피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프랑스로의 시집

이후, 1533년 14살에 삼촌 교황 클레멘스7세의 중매로 프랑스로 시집을 오게 되는데, 지참금을 들고 프랑스에 와서 미래의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가 되는 앙리 드 프랑스와 결혼을 하게되면서 다양한 공작작위의 공작부인이 되면서, 프랑스에 적응을 하게된다. 

프랑스에 와서도 귀족들로부터 이탈리아의 장사꾼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별로 탐탁치 않아하지만, 그래도 시아버지 프랑수아1세(François Ier, 1494~1547, 재위1515~1547)와 시누이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Marguerite de France, 1523~1574)가 그나마 카트린을 아껴줬다고 함.  앙리2세 게시물에도 올려놨듯이, 앙리2세가 낳은 사생아(디안 드 프랑스, Diane de France, 1538~1619)로인해 불임설이 돌면서 이혼이라는 문제에 직면할까봐 두려워했지만 이후 1544년에 장남 프랑수아 드 프랑스(프랑수아2세. François II, 1544~1560, 재위1559~1560)를 낳게되면서 안정을 찾게 되는데, 이후5명을 더 낳게되면서 지위가 강화가 됨.

 

왕비,, +과부

1547년 시아버지 프랑수아1세(François Ier, 1494~1547, 재위1515~1547)가 서거하면서, 앙리2세가 즉위함에 따라 카트린도 프랑스 왕비가 된다. 뭐 여차저차 1550년대까지는 카트린은 다산을 하게되면서 사실상 훅 지나가버리는데, 1559년 갑작스럽게 남편 앙리2세를 마상창시합에서 잃어버린다(앙리2세 게시물 참조). 

 

실세 시작

남편 서거 직후 장남 프랑수아2세(François II, 1544~1560, 재위1559~1560)가  즉위하게 되면서, 카트린은 아들의 섭정이 되는데, 이때부터 사실상 카트린과 동시에 권력의 중심으로 오르는 기즈가문의 전성기가 시작이 된다.

기즈가문이 뜨는 이유는, 프랑수아2세의 왕비인 메리 스튜어트(Marie Ire d'Écosse, 1542~1587, 재위1542~1567)의 어머니(Marie de Guise, 1515~1560)가 기즈가문의 공녀였기 때문(외척세력). 그래서 카트린은 아들의 왕권을 지키기위해 위그노와 카톨릭을 저울질하며 유지를 시킨다. 나름 효과도 있었음, 기즈가문을 누르면서도, 위그노에게도 영향력 행사.

근데, 프랑수아2세마저도 재위1년반만에 서거하여 뒤이어오른 둘째아들 샤를9세의 섭정이됨. 물론 어린아들이 흔들릴때마다 설득하고 바로잡는 역할이대부분이였는데, 이 저울질도 초반엔 효과가있었다고 하지만 그 내적으로는 갈등이 쌓이면서 결국에 폭발하게 되는 것이 바르톨로뮤 대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1572) 이다. 내용은 샤를9세 게시물 참고. 

이후 샤를9세도 24세의나이로 1574년 서거하고 막내아들 앙리3세(Henri III, 1551~1589, 재위1574~1589)가 즉위하게 되는데 성년이 된 앙리3세지만 사실상 실세였고 후원자였던 어머니 카트린이 배경이 되던 시기라고 볼 수있다. 총애하던 아들이지만 즉위이후 삐뚤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게다가 정치적노선까지 다르면서 갈등이 많았다고 전해짐.

그 절정이 세앙리의 전쟁때인데, 이미 나이가 많아 건강이 좋지않았던 카트린은 아들 앙리3세에 의해 사실상 정치에서 배제되어 앙리3세가 제어장치없이 막나가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카톨릭 핵심세력이던 기즈가문과 위그노 핵심세력인 미래의 앙리4세가 되는 나바라의 앙리(Henri de Navarre futur, Henri IV, 1553~1610, 재위1589~1610)사이에서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데, 기반을 잃은 앙리3세가 앙리4세와 손을잡고 나서 빡이친 기즈가문은 스페인과 손잡고 앙리3세를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만 오히려, 기즈공작 앙리를 먼저 암살해버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쓰러진 카트린이 1589년 1월이 되자마자 결국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됨. 아들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뒤에 평가는 더 잔인해서 학살주동자 살인마등으로 인식이되지만, 제대로 아는사람들은 카트린이 중재자로서 왕조를 지킨 인물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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