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Valois, 발루아

샤를9세

Mintaka5 2024. 5. 21. 13:21
반응형

Charles IX(1550~1574, 재위1560~1574)

샤를9세(1550~1574)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50년 파리기준 북서쪽 일드프랑스 생제르맹 앙레(Saint-Germain-en-Laye)에서, 앙리2세(1519~1559)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남.

*장남 프랑수아2세, 차남 루이가 일찍 요절하여 사실상 샤를이 차남.

큰형 프랑수아2세(1544~1560, 재위1559~1560)가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10살의 나이로 프랑스 왕위에 오르게 됨. 프랑스 기준 성년이 15세이기에 아직 미성년자 신분이라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프랑수아2세때부터 줄곧 섭정통치를 해왔고, 이는 동생 앙리3세때까지 이어지게 됨(세아들과 어머니의 치맛폭).

 

점점 더 떨어지는 왕권

앙리2세가 1559년 마상창시합때 파편이 튀어 후유증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부터 프랑스왕권이 추락하기 시작하는데, 프랑수아2세역시도 짧은 재위기간동안 어머니가 사실상 통치를 했다고 봐도 무방하고, 샤를9세에 들어서는 더욱 프랑스에 혼란스러운 사건사고들이 많이 발생하게 됨.

 

거 진짜 일많네...

당시 실세가문 기즈가문도 견제하랴.. 이탈리아를 두고 유럽의 두 강력한 가문의 쟁탈전쟁(발루아-합스부르크 전쟁, 1494~1559)의 뒷처리, 종교문제까지 아주그냥 박이 터졌다. 

 

위그노전쟁 도화선 터지다

1562년, 안그래도 골치아픈 위그노와 카톨릭간의 대립을 어떻겠건간에 온건하게 해결하고자 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였지만, 기즈가문이 불을 제대로 질러버린다. <생 제르맹 칙령>을 통해서, 어느정도 서로 합의를 보고 수용을 할 거란 기대완 다르게, 샹파뉴 바시에서 기즈 가문의 패거리들이 예배를 보던 위그노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해버린다 "바시의 학살" 프랑스 위그노전쟁(1562~1598)의 긴 서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건 뭐 그냥 카톨릭이냐 위그노냐로 번진 전쟁이라, 세력을 구축하기위해 위그노는 나바라 왕국, 영국 엘리자베스1세 여왕에게까지, 실세 기즈가문과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팽팽한 다툼이 이어졌다가 잠시 휴전했다가.. 카트린 드 메디시스 또한 중재하는데 나름 힘 썼다고 할 수는 있다. 서로의 힘겨루기로 어느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기 보단, 한쪽이 이기면 한쪽이 지고를 반복하게 되면서 나름 중간에서 중재자까지 있고.. 엄청 팽팽했다

 

바르톨로뮤 대학살

나바라는 잔 달브레(1528~1572, 재위 1555~1572)라는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분이 훗날 대왕이 되는 앙리4세(1553~1610, 재위1589~1610)의 어머니이다. 진작에 잔은 프랑스 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게되면, 아들 앙리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거라고 보고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 왕실공주와 결혼을 하면 더 루트가 곤고해지기 때문이였고, 카트린 드 메디시스 입장에서도, 변변치 못한 아들들로 자식도 없이 잘못하면 발루아 왕조가 무너질 수 있겠다 생각하여, 잔의 아들 앙리를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마고여왕, 1553~1615)와 결혼시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는데, 이 두 여왕의 생각이 일치하게 되면서 1572년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게 됨. 카트린은 아들 샤를9세마저도 당시 위그노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Gaspard II de Coligny, 1519~1572)이 샤를을 자꾸 위그노로 꼬드기는걸 가만두고 볼수가 없었는지, 기즈가문과 계획을 하나짜게되는데.. 

앙리 드 나바라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식때 하객으로 참석하는 콜리니제독을 암살하고자 계획하게되는데..근데 한명만 죽여야 할 계획이 결혼식에 참석한 위그노 전체를 죽이는 일로 커져버리게 된다. 이 8월말의 대학살로 파리에서만 수천명 지방까지 포함하면 수만명의 위그노가 학살되기에 이름. 이를 바르톨로뮤 대학살이라 함.

 

후폭풍

이 결과로 결국 다시 잠시 쉬고있던 위그노전쟁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는데, 다행인건지 당시 폴란드의 군주를 뽑는 선거가진행중에 카트린이 앙리를 후보에 올려, 결국 앙리3세가 폴란드 의회로부터 폴란드 국왕에 선출이 됨(1573년)이로 인해, 볼로뉴칙령이 떨어지고 전투가 끝나나, 이 칙령은 위그노에게는 더 축소된 형태의 내용이라 더 억눌러지게 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1574년 샤를9세가 죽기 2-3달전에 앙리4세와 콩데공작을 구출하기위한 쿠데타가 미수로 끝나지만, 다시 다른지방에서 봉기가일어나 전쟁이 또 시작됨.

그러나 폐결핵, 정신질환등으로 고생하던 샤를9세가 1574년 5월에 2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후임 국왕은 폴란드 왕위를 버리고 다시 돌아오게되는 동생 앙리3세(1551~1589)가 된다.

반응형

'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 > Valois, 발루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샤를1세 도를레앙  (0) 2024.06.01
루이12세  (1) 2024.05.26
샤를 6세  (1) 2024.05.24
프랑수아2세  (0) 2024.05.11
샤를 5세  (0) 2024.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