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코시모 데 미그리오라티(Cosimo de' Migliorati)
204대 교황 인노첸시오7세(Innocentius PP. VII, 1336~1406, 재위1404~1406)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203대 교황 | 204대 교황 | 205대 교황 |
출신 | 나폴리 왕국, 나폴리 | 나폴리 왕국, 술모나 |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
명칭 | 보니파시오9세 Bonifacius PP. IX |
인노첸시오7세 Innocentius PP. VII |
그레고리오12세 Gregorius PP. XII |
생몰년도 | 1350.xx.xx ~ 1404.10.01 | 1339.xx.xx ~ 1406.11.06 | 1327.xx.xx ~ 1417.10.18 |
콘클라베기간 | 9일 (1389.10.25~1389.11.02) |
8일 (1404.10.10~1404.10.17) |
13일 (1406.11.18~1406.11.30) |
재위 | 1389.11.02 ~ 1404.10.01 | 1404.10.17 ~ 1406.11.06 | 1406.11.30 ~ 1415.07.04 |
출생
1327년 나폴리 왕국 술모나(Sulmona)에서 아버지 젠틸레(Gentile Migliorati, ?~1376)와 어머니 마시아 오데리시(Mascia Oderisi,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04대 교황으로, 라벤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서 피사 공의회를 추진한 인물인 조반니 미글리오라티(Giovanni Migliorati, 1375~1410)의 삼촌이기도 하다. 대학교에서 법학(민법, 교회법)을 전공하였고 스승 조반니 다 레냐노에 의해 로마로 와서 교황 우르바노6세(Urbanus PP. VI)에 의해 교황청에서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1387년 라벤나 대주교로 서임, 1389년 즉위한 교황 보니파시오9세로부터 추기경 서품을 받는다. 1404년 교황 보니파시오9세(Bonifacius PP. IX, 1350~1404, 재위1389~1404)가 선종하고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인노첸시오7세로 즉위하지만, 족벌주의 노선을 택해 자신의 조카를 교황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후 조카가 교황 삼촌이 반대파로부터 욕을 먹게되면서 반대파 11명을 잡아다가 자신의 집에서 살해하고 산토 스피리토 병원 창문 밖으로 시체를 던져 로마 시민들이 발칵 뒤집히고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서 교황은 추기경단들과 피신한다. 이후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가 구원을 해주지만 이와도 대립을 이어가다가 1406년 선종한다.
경력
페루자, 파도바 대학교에서 민법과 교회법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교사생활을 하는데, 코시모의 능력을 눈여겨보던 스승 조반니 다 레냐노(Giovanni da Legnano, 1320~1383)가 로마 교황청으로 데리고 가서 교황 우르바노6세(Urbanus PP. VI, 1318~1389, 재위1378~1389)의 도움으로 교황청 내에서 직무를 맡아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1404년 콘클라베
한창 서방교회 대분열(1378~1417)시기 때인 1404년 10월 1일 교황 보니파시오9세(Bonifacius PP. IX, 1350~1404, 재위1389~1404)가 선종하여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당시 추기경들은 아비뇽 대립교황인 베네딕토13세(Antipope Benedictus XIII, 1328~1423, 대립교황1394~1423)를 적법 교황으로 인정하거나 이후 베네딕토13세가 선종한 후 선출하라고 압박을 넣고있던 중이였는데, 그럼에도 12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중 추기경들 대부분이 콘클라베에는 참석하여 선출된 교황은 서방교회의 화의를 위한 교황직 사임을 약조한 상태에서 1404년 10월 10일부터 10월17일까지 8일간 투표를 진행한결과 코시모 데 미글리오라티 추기경이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교황명은 인노첸시오(Innocentius)로 명명하고 인노첸시오7세로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공의회
1404년 당시 프랑스 왕 샤를6세(Charles VI, 1368~1422, 재위1380~1422)와 로마왕(독일왕)인 루프레히트(Ruprecht, 1352~1410, 팔츠재위1398~1410, 로마왕재위1400~1410)가 서방교회 대분열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긴급하게 교황 인노첸시오7세에게 공의회 소집을 요청한다. 인노첸시오7세는 아비뇽 대립교황 베네딕토13세()를 핑계대며 베네딕토13세가 공의회가 열려 참석하기위해 로마로 온다면 혼란으로 인한 안전보장을 할 수 없다는 구실로 공의회를 연기한다. 애초에 인노첸시오7세는 아비뇽 대립교황 베네딕토13세와 교회안정을 꾀할 협정을맺을 생각자체가 없었고
II. 족벌주의와 실수
교황 인노첸시오7세는 즉위 후 자신의 조카인 로도비코 미그리오라티(Lodovico Migliorati, 1370~1428)를 교황군 사령관에 임명시키는데, 그뿐만아니라 1405년 삼촌 인노첸시오7세가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황에 반대하는 파 11명을 공격해 본인 집에서 살해한 후 산토 스피리토 병원 창문밖으로 시체를 던지는 사건을 벌인다. 이 소식은 로마 시민들에게 알려지며 발칵 뒤집히면서 큰 분노를 유발했고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인노첸시오7세는 추기경들과 조카와 함께 피신하기위해 로마를 탈출한다. 그러나 시민에 의해 발각되면서 로마 시민들의 추격을 받게 되면서 동행하던 성직자 수십여명이 흥분한 로마 시민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시체를 버리고 달아난다. 그렇게 겨우 비테르보(Viterbo)로 피신하여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Ladislao, 1377~1414, 재위1386~1414)가 로마 시민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 진압한 이후 1406년이 되어서야 로마 시민들이 교황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로마로 다시돌아온다.
III. 기벨린 폭동
그러나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는 로마에 자신의 군대가 가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벨린파가 벌인 폭동을 지원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인노첸시오7세는 위협을 느껴 라디슬라오를 나폴리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역으로 라이몬도 오르시니(Raimondo Orsini, 1350~1406)에게 나폴리에서 반란을 일으키라고 부추기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게 교황령과 나폴리 왕국간의 대립으로 인해 수차례 전투를 거치며 소모전이 계속되다가 1406년 7월이 되어서 라디슬라오는 교황 인노첸시오7세에게 로마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나폴리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
선종
1406년 11월 6일, 6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선종한다.